민원인 상대 공무원 명찰 달게 한 것 보람느껴
민원인 상대 공무원 명찰 달게 한 것 보람느껴
  • 정리 한송학 · 사진 이용규기자
  • 승인 2012.11.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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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쌍수 진주시의원

 
문쌍수 진주시 시의원은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자기 주장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진주시 공무원들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하여 공무원들이 불편해 하고 무서워(?)하는 의원 중 한명이다.
시의원이 되어서 잘한 일로 민원공무원 명찰을 달게 한 일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문의원은 공무원 실명제가 다른 부분에서도 확대되어야 공무원들이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시민의 입장을 더 생각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구식 전의원의 천거로 공천을 받아 시의회에 진출한 문의원은 지난번 총선 때 최구식 전의원과 함께 새누리당을 탈당해 아직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았다. 복당할 생각이 별로 없다는 문의원은 시의원은 평생 할 직업은 아니라고 말했다.
지난해 연말 역주행해 오는 차량과 충돌해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쳤으나 지금은 대부분 회복했다.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문의원은 제2의 인생을 살게 됐으므로 무언가 의미있는 일들을 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겠다고 강조했다.

▲ 문쌍수 진주시의원(왼쪽)은 본지 황인태 회장과의 대담에서 “진주시 공무원의 벽이 두터워 개혁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공무원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하다 보니 평생 시의원 하나 보자는 등의 좋지 않은 소리도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다음은 문쌍수 의원과의 인터뷰 요지이다. 

-어떻게 정치에 인연을 맺게 됐나.
▲10년 전부터 봉사활동을 주로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0년 전부터라면 6대 지방선거 이전에 정치의 기회가 있은 것 아니냐.
▲5대 지방선거 때도 공천을 신청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낙천이 됐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라는 말들이 많았지만 접었다. 접는 것이 신의에 맞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6대에 공천이 되었나.
▲그렇다. 6대에는 공천신청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최구식 의원 측에서 신청해 보라고 권유해서 신청하게 됐다. 5대 때의 경험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망설였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공천을 준다고 해서 신청했다.
-선거를 해보니 어떻던가.
▲정말 저는 선거가 재미있었다. 선거가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즐겁게 하다 보니 선거가 끝나 있더라.
-어떤 점이 그랬나.
▲선거를 할 때 특히 아이들이 많이 따라 다녔다. 아이들이 줄을 지어 따라 다니는 통에 혹시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왜 아이들이 그렇게 따라 다녔나.
▲로고송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제 로고송이 쌍둥이 쌍수 문쌍수라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노래였다. 그래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아이들이 졸졸 따라 다녔다. 또 제 유세차량 그림이 제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아이를 무등 태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저를 좋아했다. 실제로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들 때문에 문쌍수 찍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리고 여중생들도 따라 다녔다.
-여중생들이 왜 따라 다녔나.
▲이름이 쌍수 이다 보니 쌍꺼풀 쌍수 문쌍수 보자...하면서 따라 다녔다. 제 이름이 재미있어서 그런지 유세 때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래서 성적이 어떻게 됐나.
▲제 지역구에서는 1등을 했다. 선거 끝나고 KBS에서 경남에서 선거운동 잘한 곳 4곳을 뽑아서 방송을 했는데 제가 뽑혀 방송이 됐다. 선거운동을 잘 했다는 평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원래 그렇게 선거나 정치에 재능이 있나.
▲전혀 그런 것은 아니다. 정치보다는 사업에 더 재능이 있다.

▲ 문쌍수 시의원이 10월 진주축제 행사장을 방문해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시의원을 해보니 어떤가. 당초 기대하고 같은가.
▲사실 좀 실망했다. 당초에는 많은 일을 할 줄 알았는데 기대만 못하다. 벽이 많다.
-어떤 벽들인가.
▲실제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의원이 아니라 공무원들이다. 의원들이 아무리 지적하고 열심히 해도 공무원이 추진해 주지 않으면 정책은 실현되지 못한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어려움이 많다.
-그래도 시의원 되고 나서 바뀐 것이 있을 터인데. 어떤 것이 기억에 남나.
▲민원 공무원에게 명찰을 달게 한 게 기억에 남는다. 민원인들 입장에서는 담당 공무원 이름도 모르고 업무를 보는 게 답답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민원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 명찰을 달자는 제안을 했다. 그런데 이것도 정착되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시의 총무국장도 만나고 설득을 많이 했다. 시의회 의장까지 동원해 압박을 가해 실현이 되도록 했다. 이것 실현되는 데 1년 정도 걸렸다. 공직사회는 이렇게 사소한 것도 바뀌는 것이 어렵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정책인가.
▲사실 이름표라는 게 중요하다. 명찰을 달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잘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간단한 일이지만 집요하게 추진한 것이다.
-공무원들이 그렇게 바뀌지 않나.
▲정말 잘 안 바뀐다. 그래서 제가 지적을 많이 하게 된다. 지적을 많이 하다 보니 문쌍수 나쁘다는 말이 많이 돈다. 네가 평생의원 할거냐, 하는 말도 들었다. 제가 있는 곳에서는 안하지만 그런 소리들을 많이 한다. 그러면서 제가 하는 일 들을 교묘히 방해를 한다.
-어떻게 방해를 하나.
▲시의원들은 저를 비롯해 주민들의 민원을 많이 부탁하게 된다. 그런데 제가 공무원들에 대해 지적을 많이 하니 “문쌍수가 이야기 하면 안 해준다.” 그런 식으로 제 발을 묶으려고 한다.
-그래도 지역의 민원사업을 해야 할 텐데. 전혀 못했나.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할 일은 한다.
-지금까지 성과를 말해 달라.
▲천전시장 포장사업도 했고 가호동의 길도 넓혔고 가호동 아파트 주변에 가로등도 설치했다. 또 가호동 산책로도 만들었다.
-이렇게 힘든데 시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도 시의원직은 의미 있는 직책이다.
-잘했다고 생각하나.
▲시의원 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지역마다 숙원사업, 민원이 있다. 이런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어서 좋다. 또 많은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도 좋다. 저의 경우는 제가 모질게 해서 그런지 민원이 해결되지 않고 미제로 남는 것이 별로 없다. 해결되지 않으면 해결될 때까지 제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저에게 온 민원은 거의 다 해결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큰 숙원사업은 잘 안되지만 그렇지 않은 소소한 것들은 거의 다 해결된다. 제 정치 슬로건이 “1등 머슴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 1등 머슴이 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고 있다.
-시의원에 재미를 느낀 것 같은데 다시 할 것인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고 싶다. 한번 정도는 더 해서 의회 기강을 반석위에 올려놓고 싶다.
-왜 계속하지 않고 한번만 더 할 것인가.
▲시의원은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저의 경우는 한번정도 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제 본래의 일을 하는 게 좋다.
-지난번에 집행부와 시의회가 갈등이 심했는데
▲저는 갈등이라고 보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뉴스가 되는 게 이상하다. 의회는 의회의 판단기준이 있고 집행부는 집행부의 판단기준이 있다. 이것이 다른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충분히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었으면 그것이 표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집행부에서 소통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작년인가 큰 사고가 났는데 몸은 어떤가.
▲이제 거의 완치됐다.
-어떻게 하다가 사고가 났나.
▲남해고속도로 군북IC 근처였는데 역주행 해 오는 차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상대방이 시속 120km로 역주행 해 왔는데 보는 순간 충돌했다.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는 다리를 다쳤다. 모두 다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거의 완치돼 조금만 더 치료하면 된다. 활동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지금 생각해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천운이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왜 상대 차량이 역주행 해 왔나.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중앙분리대도 있고 역주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그랬다.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력이 어떻게 되나.
▲1953년 산청군 신안면에서 태어났다. 신안초등학교와 단성중학교, 진주기계공고를 나왔다.
-공부는 진주기계공고가 마지막인가.
▲그렇지는 않다. 공고 전기과를 졸업했는데 반에서 3등 안에 들었다. 그래서 추천받아서 서울 신도림동에 있는 한국타이어에 입사를 하게 됐다. 한국타이어에 입사해서 보니 대학나온 사람과 공고 나온 사람은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군대를 가는 바람에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군대제대 후 부산의 태광실업 다니면서 당시 동의공전 야간부에 등록해 공부를 마쳤다. 동의공전을 졸업하면서 기사자격증을 땄다. 이것이 후에 제가 사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을 했나.
▲동의공전 졸업 후 진주로 와서 당시 진주에서 큰 기업이던 대동건설에 취직했다. 여기서 10년을 다녔다. 대동건설에 다니면서 경남과기대 전자공학과에 편입하여 학사학위를 마치고 석사학위까지 했다. 대동건설에서 제 나머지 인생의 기반이 다 잡힌 셈이다. 대동건설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공부한 것을 보니 의지의 한국인이다. 이렇게 주경야독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리 직장생활을 한다고 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일등이 될 수 없다. 저는 제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자부심이 지속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본인의 사업을 한 건 언제인가.
▲1994년도에 (주)쌍용전기통신소방을 설립해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시작됐다.
-잘되고 있나.
▲연간 30~50억원 정도의 매출을 꾸준히 올린다.
-시의원을 하고 나서도 직접 경영하나.
▲지금은 직접 경영하지는 않고 직원들이 다 한다. 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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