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시공 적발해 예산 회수한 것 잘한 일
부실시공 적발해 예산 회수한 것 잘한 일
  • 정리 한송학 · 사진 이용규 기자
  • 승인 2012.11.1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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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보 진주시의원

 
대담장을 들어서는 심현보 시의원은 멋쩍은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정식 인터뷰는 처음이라 뭘 말해야 할지 얼떨떨하다는 말로 서두를 꺼낸 심 의원은 그러나 비교적 소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시의원 하는 것을 심현보가 이 세상에 와서 살다 갔다는 표식을 남기기 위해서 한다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고는 그래도 힘이 없는 사람, 소외된 사람을 대변하는 시의원의 일이 의미있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잘하는 분야가 그래도 평생 해 온 건설 분야라 시정 질의도 부실시공등이 많다고 하면서 2011년 부실시공을 적발해 예산2억원을 회수조치할 때는 시의원 된 것에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시의원 하면서 평생 해 오던 건설회사를 폐업했다는 심의원은 그래도 건설업을 통해 먹고살만한 돈은 벌었다고 밝혔다.
평생 진주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주고 받는 친구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고백했는데 시의회에서는 4대때 함께 한 이인기 의원이 그래도 마음을 주고 받는 사이라고 말했다. 다음번에도 한번 정도는 더 시의원을 해서 경험 많은 시의원으로 진주시의회를 반석에 올려놓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 심현보 진주시의원(왼쪽)은 본지 황인태 회장과의 대담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고 싶었고 이 지역에 심현보가 살다갔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 시의원이 됐다”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다음은 심현보 의원과의 인터뷰 요지이다. 

-인터뷰가 처음인가.
▲그렇다. 이렇게 언론과 정식으로 인터뷰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얼떨떨하다. 쉬운 것만 물어달라.
-이력이 어떻게 되나.
▲1952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출생이다. 학교는 진주로 나와서 오미초등학교, 대아중학교, 동명고등학교를 나왔다. 당시는 해인고등학교였다.
-학교졸업하고 한일은 무엇인가.
▲당시 마산에 있던 한국철강이라는 회사를 다니다가 결혼하고 나서 건설회사를 창업했다. 그 회사를 2006년까지 했다.
-지금도 회사를 경영하고 있나.
▲2006년 회사를 폐업했다.
-왜 폐업을 했나.
▲시의원과 회사를 함께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폐업을 했다.
-회사 이름이 무엇인가.
▲시대건설이라고 진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였다.
-연 매출은 얼마나 됐나.
▲한 2백억원 정도 됐다.
-건설로 돈을 많이 벌었겠다.
▲당시는 건설경기가 좋았던 시절이고 또 건설회사도 많이 없어서 돈은 꽤 벌었다.
-그럼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 시의원 해보자, 하고 도전했나.
▲그런 것 보다는 저는 원래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게 익숙하다. 그래서 시의원으로 본격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보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시의원은 언제 됐나.
▲4대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6대에는 미래연합으로 당선됐다.
-왜 공천은 받지 못했나.
▲미래연합도 정당이었으니까 공천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무슨 정당인가.
▲새누리당이다.
-시의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지역사회에서 어려운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고 싶고 심현보가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갔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 시의원을 하고 있다.
-시의원으로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인가.
▲제가 잘하는 분야가 건설분야이다. 그렇다 보니 시의원이 돼서도 건설관련 일을 많이 하게 된다. 시의원을 하면서 각종 부실 시공 방지와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특히 2011년 행정사무감사에서 일반성면 현지감사를 통해 설계도면과 일치하지 않은 부실시공사항을 적발해 예산회수 조치를 취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외 어떤 일을 추진했나.
▲수곡면 원외리는 상수도 혜택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물 공급을 추진한 것이 기억에 남고 대평면 딸기 직판장 예산을 확보하여 현재 공사중이다. 8억원이라는 적지 않은 예산인데 마침 마련이 되어서 올 연말 완공예정으로 공사중이다. 이외에도 명석면 외율 마을회관을 건립하였고 판문동 경로당을 보수하였으며 이현동 우회도로 예산 2억원을 확보하여 내년에 착공예정으로 있다.

▲ 심현보 진주시의원이 관내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해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4대 의원을 했는데 4대 때는 무슨 일을 했나.
▲4대 때는 진양호 관련 일을 했다. 진양호 둘레에 벚꽃나무를 심었다. 약 100리에 해당되는 데 2~3년 있으면 벚꽃이 장관일 거다.
-진주 공설운동장과 관련 매각을 반대한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저는 매각보다는 공원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매각을 반대했다. 그런데 시의 입장이 강경해서 그렇다면 이현동 공원부지를 조성하는 조건으로 매각에 동의했다.
-현재 시의회 부의장으로 후반기 시의회 집행부인데 후반기 원구성이 시끄러웠는데.
▲아니다. 후반기 원구성은 잘 됐다. 전반기는 오히려 의정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어서 문제가 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데 후반기는 경험이 많은 사람들로 집행부가 구성돼 잘됐다고 생각한다.
-의회와 시 집행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의회 집행부가 시 집행부를 견제하는 것 아닌가.
▲의회의 목적이 시 집행부를 견제하고 감시 감독하는 것이다. 의회는 시민들의 재산을 자기들 주관대로 하는 것을 견제하고 방지하기 위해서 제동을 거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고 경종을 준 셈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인가.
▲만약 시 집행부가 계속 시민들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들 주관대로 일을 한다면 시민들 뜻에 맞추어서 조례나 예산심사를 할 것이다.
-의장단과 시장과 사이가 안 좋다는 말도 있다.
▲사이가 안 좋다기 보다는 뜻이 차이가 난다. 물론 시장도 시민을 위해 정책을 펴겠지만 의회 역시 집행부의 정책이 시민들 뜻에 합당한지 여부를 분석해 행동하는 것이다.
-이창희 시장은 잘하나.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나.
▲이 시장이 처음에는 독선적이라고 느꼈는데 후반기 와서는 많이 완화된 것 같다.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시민과 호흡을 맞추려는 노력이 보여 진다.
-전반기에는 이 시장이 그렇게 하지 않았나.
▲전반기에는 부정적인 느낌도 있었는데 후반기 와서 제대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의원 하는 게 재미있나.
▲재미 보다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하던 사업도 접고 열심히 하고 있다.
-다음번에 다시 도전할 것인가.
▲현재 생각으로는 다시 도전하려고 한다. 다음번에 성공하면 3선의원이 된다. 다선의원이 많은 경력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심현보의 업적을 남기고 싶다.
-무소속으로 당선되는 등 정당과 관계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천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시의원은 정치인이 아니다. 따라서 정당이 공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의원은 시민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정당에 구속돼서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의원 정당 공천제는 폐지되는 것이 옳다.
-이야기를 돌려보자. 진주에서만 살았나.
▲그렇다. 진주에서만 살았다. 태어나기는 산청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진주에 와서 진주에서 학교를 나왔고 사업도 진주에서 했고 진주에서 시의원을 하고 있으니 오리지널 진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에서만 살았으면 친한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기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친한 친구 한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는 데 나이가 들어보니 그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친한 친구로는 진주시 공무원을 하다가 퇴직한 유기호가 있고 법무사를 하는 김동영 법무사가 있다.
-의회 내에서는 친한 의원이 누구인가.
▲의회에서도 진실하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다들 자신들 입장이 있어서 그런지 사실이 그렇다.
-그래도 친한 의원이 있을 것 아닌가.
▲이인기 의원이 4대 때부터 같이 했던 사람이라 그래도 친하다고 할 수 있다. 연령도 제일 가깝고 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의한다.
-본인은 성격이 어떤 사람인가.
▲저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가진 것이 없어도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보이는 것 보다 실제 마음은 여리다. 그래서 어떤 잘못도 시인하기만 하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건설업을 평생 했는데 어려움이 없었나.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건설업은 입찰을 보고 회사를 운영하면 되니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특히 당시는 건설회사가 많지 않아 요즈음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는 않았다.
-직원은 얼마나 됐나.
▲한 30명 됐다.
-진주에서는 큰 회사인가.
▲진주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였다.
-본인이 공사한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건물이 있나.
▲진주시에 있는 농협건물은 대부분 제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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