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 높이 자유를 꿈꾸는 연에 미친 사나이
창공 높이 자유를 꿈꾸는 연에 미친 사나이
  • 허홍구 기자
  • 승인 2011.05.28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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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연마을 김명운 원장

▲ 민속연마을 원장 김명운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가오리 연을 만들어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다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언덕 위에 모여서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연을 날리고 있네. 꼬리를 흔들며 하늘을 나는 예쁜 꼬마 연들이 나의 마음 속에 조용히 내려앉아 세상 소식 전해 준다. 울먹인 연실에 내 마음 띄워 보내 저 멀리 외쳐 본다. 하늘 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고운 꿈을 싣고 날아라. 한 점이 되어라. 한 점이 되어라. 내 마음 속에 한 점이 되어라.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언덕 위에 모여서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연을 날리고 있네’
1980년대 대학가요제를 통해 발표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리는 ‘연(鳶)’이란 노래가사다. 사천의 ‘민속연마을’ 원장 김명운(46)씨. 취재진이 김 원장을 만나기 위해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자 당연히 컬러링으로 이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민속연마을 원장 김명운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연 만들기를 배워 30년을 넘게 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금도 우리 민속 연을 계승 발전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할아버지부터 연 만들기 3대째
연은 지금처럼 TV와 컴퓨터 게임이 대중화되기 이전에 아이들의 대표적인 겨울놀이였다. 그때는 겨울철이면 동네어귀나 강가, 들녘 등에서 하늘높이 연을 날리는 광경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민속연마을 김명운 원장 역시 어린시절 고향인 사천에서 겨울철이면 연을 벗삼아 친구들과 뛰어놀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도의 연 만들기와 날리기 재능을 물러받아 남다른 소질을 갖고 있었다.
사천읍지역에서 당시에는 연을 좀 날렸다는 사람들은 김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을 한번쯤은 날려봤을 정도로 연만들기에는 소문난 집았이었다. 따라서 김명운씨도 당연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연 만들기와  연날리기에는 다른 아이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씨 뿐만 아니라 그의 형인 명주씨와 명원씨도 연 만들기에 연 날리기에는 타의 주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전문적으로 연 만들기를 배웠다기보다는 어릴적부터 어깨너머로 연 만드는 과정을 배워 자연스럽게 연과 친하게 되고 연 만들기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연날리기대회 입상 싹쓸이
이렇게 연과 친하게 지낸 김명운씨는 초등학교 시절인 지난 1978년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연을 가지고 전국 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했다. 당시만해도 사천과 진주는 물론 전국 곳곳에서 연 날리기 대회가 열렸었다. 처음 연 날리기대회에 참가한 김씨는 내놓으라는 실력자들을 당당하게 물리치고 학생부 2위를 차지했다. 연 날리기대회는 연을 높이 날려 서로 줄을 뒤엉키게 만들어 상대방 줄을 먼저 끊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이후 김명운씨는 도내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연 날리기대회에 참가해 단골 입상을 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초등학교때부터 연 날리기대회에 참가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도움없이 자신이 직접 만든 연으로 대회에 참여했다.
연 날리기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자신이 날릴 연과 얼레를 정성스럽게 만들고 명주실에다 풀을 먹이고 사금파리 가루를 뭍여 전국에서 참여한 내놓으라는 연 날리기 고수들과 실력을 겨뤘다.
김씨는 한번 연을 날리면 최고 4㎞ 정도는 띄운다. 한번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창작연 날리기 시연을 하다 연에 어린이를 태워 50m 정도 띄우기도 했다.
 

◇연에 미쳐 생업도 뒷전

김명운씨는 사천에서는 ‘연에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도 전국 어디에서나 연 날리기 대회가 열린다면 휴가를 내고 참가했다. 이렇게 연에 미쳐 전국 20여개 연 날리기대회를 쫓아다니다보니까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다. 김씨는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나이트클럽도 운영하고 민속주점, 중국음식점, 세탁소 등 개인사업을 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틈만나면 연을 만들고 계절에 상관없이 연을 날리다보니 개인사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여름철이면 남일대해수욕장에서 연을 날렸고, 각종 지역축제나 행사장을 다니면서 자신이 만든 연을 날렸다.
우리나라의 전통연은 가오리연과 방패연 2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20여년전에 해외에서 창작연이 들어와 공작, 독수리 등 갖가지 형상을 한 연이 각종 행사장에서 시연되면서 김씨의 전통연이 한때는 뒤로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 1986년부터 연 만들기를 본격적인 직업으로 삼아 우리 전통 연 만들기만을 고집하고 있다.
◇김씨 3형제 1992년 ‘민속연마을’개업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연 만들기 재주를 물러받은 김명운씨 3형제는 지난 1992년 사천에서 ‘민속연마을’을 개업해 우리 전통 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형인 명주씨는 7년전에 다른직업으로 전직했고, 최근에는 동생 명원씨도 ‘민속연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김씨만은 여전히 연만들기를 천직으로 여기고 ‘민속연마을’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연을 만드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연 만들기를 생업으로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연 만들기도 우리 전통 공예작업 중의 하나이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된다. 또한 연을 날리는 계층이 대부분 초등학생들로 판매처도 학교앞 문구점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수년전부터 값싼 중국산 연이 몰려와 전문 판매점이 아니면 우리 전통연을 구하기 힘든 실정이다.
김씨가 1년에 만드는 연이 최소 1만개 이상이 된다. 하지만 행사장 등에서 단체로 구입하는 것 외에 연을 납품할데는 없어 전통 연을 만들어 생업을 유지하는 김씨의 생활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따라서 김씨는 초등학교 교재로 연을 납품하는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값싼 중국산에 밀려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연만들기 체험관 만들고파
민속연마을 김명운원장은 10년전 공방을 준비하다 못에 찔려 제때 치료를 하지않아 파상풍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실의에 빠져 좌절하는 등 심할 갈등을 겪었을텐데, 김씨는 별로 개의치 않은 표정이다.
그는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다리한쪽 없는 것이 무슨 대수냐”며 “예전처럼 행동을 급하게 할 수 없지만 운전도 할수 있고 크게 불편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김씨는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우리 민속 연 만들기와 보존활동에는 여전히 열성적이다. 지금도 그는 각 지자체들의 행사장에 초청돼 연 날리기 시연을 할때는 연 1200여장을 연결해 창공에 날리는 묘기를 선보일때도 있다.
특히 김씨는 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G20 외무장관회의에 초청돼 만국기을 연으로 만들어 날려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김씨는 “내 몸이 허락하는 한 연 만들기 작업은 계속할 것”이라며 “만약 연에 많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지자체, 기업 등의 협조를 얻어 전국 최초로 연만들기 체험관을 건립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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