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집짓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7.2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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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옥/작가ㆍ약사


삼광조의 수컷은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멋진 꼬리를 가졌다. 자신의 몸보다 배는 더 긴 꼬리다. 올여름 이 새의 생태를 추적하고 있는 한 지인은 암수가 함께 떡갈나무에 집을 짓고 있었다고 전했다.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의 저서 '욕망의 진화'에는 잘 지은 집을 예물로 선보이며 신부를 유혹하는 새도 소개되고 있지만 새는 암수가 함께 집을 짓는 모양이다.  
새에게 집은 번식을 위한 도구다. 새끼가 자라면(육추가 끝나면) 버리고 떠난다(이소한다). 다음 해에 다시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다시 짓는다. 그러니 새들의 집은 한 새끼를 낳고 키우고 세상으로 내보내는 온전한 보금자리인 셈이다.
 번식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불행한 사고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실패(뱀 같은 천적이나 강풍과 폭우, 폭설 같은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로.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하더라도 2차, 3차 번식을 시도한다. 짝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함께. 넓은 나뭇잎을 눈가림 지붕 삼아 나무껍질과 이끼와 거미줄과 풀과 다른 새의 깃털을 모아들여 컵처럼 생긴 집을 짓고, 장대비 속에서도 처연하게 둥지를 지키며 먹이를 나르고 교대로 알을 품는 새들의 모습은 흔한 감동을 넘어 비장하고 엄숙하다. 새는 그러니까 보금자리 혹은 요람이라는 인간의 언어에 가장 안성맞춤인 종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집은, 그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다. 그 집이 아무리 고대광실 크고 넓고 화려하더라도, 부나 권력의 상징 혹은 축재의 수단으로 쓰이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에 맞는 (혹은 처지에 맞지 않는) 집을 ‘장만’할 뿐이다. 집은 집장사들이 지은 상품에 불과할 때가 많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다.  
가진 것 없고 물려받은 것도 없고 배운 것도 별로 없이 많은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거짓말을 잘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영리하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약간의 詐와 邪를 버무려 어떻게든 살아남으므로 자기 식구를 먹여 살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세상이 바뀌고 천지가 개벽하고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가장으로서 무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잘 먹고 잘 살지는 못해도 그의 그늘 아래 세파로부터 비껴나 큰 고난 없이 생존할 수 있다.  
 반대로 남을 속이거나 뺏는 일에 서툰 사람들이 있다. 극한 상황에서도 나 살자고 거짓을 행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는 변화에 당황해하고 변신에 서툴며 변심할 줄 모른다. 사람 좋다는 소리,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지만 그의 가족은 배를 곯을 개연성이 높다. 어쩌면 극빈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어떤 세상인가. 멀쩡한 학력과 직장을 졸지에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살아남는 자. 그리고 번식에 실패하는 자. 자연에는 이렇게 두 부류가 존재한다. 인간의 언어는, 세상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고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쓴다. 나는 빈 둥지만 동그마니 남기고 번식에 실패한 암수 한 쌍의 새를 보며 가슴 아파 하지만, 교활하게 살아남는 인간은 좋아할 수가 없다. 이 아이러니라니. 인간은 남을 딛고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종(種)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오만이다. 본능을 초월하는 이성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살아남는다는 것, 먹고산다는 것의 지엄함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아직은 삶의 쓴맛을 덜 보았기 때문일까. 장마(기상청은 2009년부터 이미 장마 예보를 하지 않고 있다) 혹은 호우 대신, 스콜이라거나 우기(雨期)라는 낯선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은 비 많은 이 여름에 드는 잡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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