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쌍재공수농장 석재규 대표
<3>쌍재공수농장 석재규 대표
  • 정리 한송학·사진 이용규기자
  • 승인 2013.06.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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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는 재배가 안되는 속성 있어 자연상태로 둬야

▲ 석대표가‘쌍재막걸리 바’라고 이름 지은 둘레길 쌍재 쉼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지리산둘레길이 열리고 마침 1박2일이라는 TV프로에서 지리산둘레길 5구간이 소개되자 하루에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둘레길을 찾았다. 지금은 평일에는 거의 없고 토, 일요일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둘레길 5구간을 찾고 있다. 석 대표 농장은 둘레길이 관통하고 있어서 그 덕분으로 쉼터가 잘 된 것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석재규(53) 쌍재 공수(空手)농장 대표는 자신은 약초 귀농인이 모델로 삼기에는 조금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귀농할 때 귀농에 대한 준비도 없었고 또 지금도 특별히 계획을 세워 약초농사를 짓지 않는 점이 그렇다고 했다. 특히 석 대표는 자신의 약초농사 경험을 통해 약초는 재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약초농사꾼이라고 하는데는 한사코 반대했다. 농사를 반대하는데 귀농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겠느냐는게 석 대표의 주장이다. 석 대표는 많은 실패 끝에 지금은 약초농사를 짓지 않는다. 농사를 짓기 보다는 씨만 뿌리고 자연상태에서 성장한 것을 수확한다. 다 죽어도 그만이고 다 살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씨를 뿌린다. 일종의‘자연농법’이랄 수 있는 것을 경험으로 실천하고 있다.
“약초란 게 희한해서 일단 사람손이 가기 시작하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일이 많아져요. 손 놓고 돌아 앉으면 풀 뽑고 거름 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예 사람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죽든지 살든지 놓아두면 더 잘 자라요.”
석 대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연의 법칙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아무튼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약초는 그런 성질이 있다고 했다. 자연의 법칙이 아니겠냐고 짐작은 하지만 자신을 이것을 이론을 통해 배운 게 아니고 오랜 약초농사 경험을 통해 배운 약초농사의 비법이라면 비법이라고 했다.
실제 5만평에 이르는 그의 쌍재 농장에는 산양삼, 오미자, 더덕, 도라지, 곰취, 엄나무, 가죽나무, 참당귀 등 수십 가지의 약초가 심어져 있지만 자연상태나 다름없이 자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참당귀는 꽃이 피면 뿌리가 썩어서 약재로 쓸 수 없는 데 자연상태로 두면 꽃이 잘 안 핀다. 그런데 이 참당귀를 밭에다 심으면 바로 꽃이 피어버려 약재로 쓸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라 했다. 욕심을 내서 더 잘 키워보려고 하면 그 반대로 되는 게 약초라는 것.
석 대표는 귀농한지 15년째이다. 이제는 연 소득이 1억 원은 되어서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는 정도가 됐다고 한다. 그런데 5년까지는 소득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5년까지는 투자하고 배우는 데 돈이 다 들어가 도시에서 귀농할 때 가져온 돈을 다 써 버렸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물론 그 때 투자한 것이 지금의 자산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 하기는 어려워서 후배 귀농인들이 배우기는 조금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는 석 대표가 그냥 겸손하게 흘리는 말에서 후배 귀농인들이 배울 게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농장 이름이 쌍재공수농장이다. 공수는 空手의 의미로 빈손이라는 뜻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란 의미에서 이렇게 농장이름을 지었다는 게 석 대표의 설명이다. 특히 약초를 취급하면서 욕심을 내는 것은 금물이라는 게 석 대표의 지론이다. 이렇게 욕심을 내지 않아도 산에서, 자연에서 다 먹고 살게 해 주더라는 게 석 대표의 경험이다.
“그동안 고생은 했지요. 그래도 농장이 둘레길에 있다보니 제 또래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 사람들의 고민은 주로 미래와 관련된 것이예요. 퇴직 이후가 걱정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적어도 미래는 걱정하지 않으니 그 사람들에 비하면 좋은 편이예요.”
늘 자연과 함께 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앞으로 더 나아지면 나아졌지 나빠질 일은 없는 상황이라며 고향에 돌아온게 잘한 것 아니냐는 석 대표의 귀농 성공론이다.                                                                         /

▲ 농장 가는 길에 만난 고뢰쇠 가로수 터널. 이 고로쇠 터널은 4km나 되는데 15년 생들이다. 산청군이 고로쇠 보급을 위해 심은 것인데 매년 고로쇠가 나오는 이른 봄에는 마을 주민들이 고로쇠 수액을 채취한다.
산청군 쌍재 출신 고향으로 귀향해 약초농사 시작

석재규 대표는 원래 쌍재 출신이다. 석 대표 말로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가 크게 되라며 자갈밭 팔아서 대처로 공부시키러 보냈다고 했다. 석 대표가 간 곳은 부산이었다. 석 대표는 부산에서 학교도 다니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30년간 살았다. 직장생활을 했지만 늘 마음에는 고향의 산천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8년부터 고향 쌍재마을에 들어왔다. 고향 마을에 돌아오니 원래 15가구가 살던 마을인데 수 십년간 한 가구도 살지 않아서 완전히 폐허가 돼 있었다. 석 대표는 그때부터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아들 공부시키느라 평당 몇 백 원에 판 산도 평당 만 원 이상 씩 주면서 다시 사 들였다. 이렇게 해서 5만평에 이르는 농장을 만들었다. 이렇게 할 동안 가족과 아이들은 부산에 그대로 있었다.
아내 최윤미(49)여사는 부산이 고향인 사람이다. 그래서 산골생활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 남편을 말리지도 못하고 고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나도 남편의 바람이 줄어들지 않자 결단을 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둘 다 망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의 고집을 꺽고 남편과 함께 하기로 했다. 2000년 이었다. 가끔 다니러 산청에 오기는 해 봤지만 이렇게 산골짝인 줄은 몰랐다. 7년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촛불 켜고 살았다. 그렇게 살 때 남편 친구부부들이 가끔 놀러 와서는 자신들의 아내들한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어. 당산은 행복한거야.” 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났다. 정말 왜 이렇게 살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좋아했다. 아이들은 아빠의 생각을 이해하고 산골생활에 잘 적응해 갔다. 지금 큰 아이는 대학 4학년이고 막내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들은 공부 때문에 진주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농장에 와서 아빠 일을 돕는다. 아이들이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최 여사도 적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13년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도시에 가서 살라고 해도 살지 못할 정도로 적응이 돼 버렸다. 산골생활이라 심심할 것 같아도 너무 바빠 심심할 틈이 없을 정도이다. 이제 약초 고객들도 많이 생겼고 또 농장이 지리산둘레길이 관통하고 있어서 쉼터로서도 제법 잘 된다. 도시에 있을 때 보다는 소득이 오히려 늘었고 소득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아 걱정이 없다. 그때 도시생활을 접고 산골에 들어오기로 한 결단이 잘 됐다는 생각이다.

▲ 농장 가는 길에 만난 류의태 약수터 팻말. 허준 선생의 스승인 류의태 선생이 이 물로 약을 달였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300m 올라가면 있다. 이 물로 약을 달여 먹고 병을 나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재밌다.
석 대표 농장 TV 방영된 지리산둘레길 5구간이 관통

석재규 대표가 경영하고 있는 쌍재공수농장을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구형왕릉을 통해 동의보감 둘레길을 통해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지리산둘레길을 통해 가는 길이다. 승용차로 가려면 동의보감 둘레길을 통해 가야 한다. 대전-진주 고속도로 산청 인터체인지를 나와 엑스포의 주 무대인 동의보감촌을 지나 2km 쯤 가면 구형왕릉이 있다. 구형왕릉을 향해 올라가다가 류의태 약수터 팻말을 보고 좌회전 해 올라가는 길이 동의보감 둘레길이다. 동의보감 둘레길은 포장이 돼  있어 승용차로도 갈 수 있다. 여기서 류의태 약수터까지 와서 약수터를 지나서 3km 쯤 가다보면 쌍재 가는 길과 화계 가는 길의 3거리 이정표가 나온다. 왼편이 쌍재 가는 길이고 오른편이 화계 가는 길이다. 왼편 쌍재 가는 방향으로 다시 3km를 가면 집 한 채가 나온다. 이 집을 지나 다시 1km를 더 가면 석 대표 농장이 나온다. 승용차로 가기 위해서는 이 길을 이용해야 한다. 구형왕릉에서 석 대표 농장까지 산길을 30분 정도 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 길이 워낙 아름다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석 대표 농장까지 갈 수 있다. 길 주변에 4km에 이르는 고로쇠 가로수 터널이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로쇠 가로수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지리산둘레길을 통해 가는 방법이다. 이 길은 승용차로는 갈 수 없다. 지리산둘레길 5구간의 시작점인 금서면 방곡리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승용차를 주차해 두고  출발하여야 한다. 추모공원을 지나 상사폭포를 향해 올라가서 상사폭포를 지나면 바로 석 대표의 농장이 있다. 농장이 상사폭포 바로 위에 있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상사폭포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둘레길이 바로 석 대표의 농장을 마당을 관통해 지나간다. 그래서 석 대표 농장은 ‘쌍재쉼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수천 명씩 둘레길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많이 줄었다. 평일에는 거의 없고 토, 일요일에는 그래도 수백 명은 된다. 석 대표는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거고 예전이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때는 방송의 영향으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봐야죠.”라고 말했다. 1박2일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지리산둘레길 5구간이 방영된 후 관광객이 일시에 몰렸던 것. 석 대표 농장을 1박2일에서 이수근씨가 다녀갔다. 그래서 한 때 붐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금도 지리산둘레길 5구간을 걷는 사람들은 꼭 석 대표의 농장에 와서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고 간다. 처음에는 막걸리를 담갔으나 워낙 수요가 많아 지금은 산청양조장에서 만든 것을 가져다 판다. 필자가 취재하러 갔을 때도 둘레길을 걷는 트래커들이 계속 지나갔다. 트래커들 가운데 2명은 석 대표 농장에 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 점심이래야 간단한 국수이지만 그래도 땀이 난 트래커들에게는 꿀 맛일 거다.
원래 쌍재라는 이름은 고동재와 바람재라는 두 재가 있다는 데서 생긴 지명이다. 쌍재라는 재는 없다. 그래도 워낙 쌍재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져 석 대표도 쌍재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 주변 야산에 있는 자연산 참당귀. 세발당귀라고도 불리운다. 야생 참당귀는 약효가 뛰어나 산삼보다도 낫다고 말했다. 냄새를 맡아보니 냄새가 아주 강했다.
처음 5년간은 소득 없이 투자만 하고 소득은 없어

석 대표가 자신의 고향마을에 돌아와 보니 마을이 완전히 폐허가 돼 있었다. 석 대표가 어릴 때는 15가구가 살았으니 제법 넓은 밭도 있었다. 석 대표는 이 땅을 다시 사 들였다. 석 대표가 사 들인 땅은 모두 5만평이었다. 땅을 모두 사는데 5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에는 소득은 없고 투자만 되는 시기였다. “5년 동안 먹고살 돈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거지가 됐을 겁니다.” 석 대표는 직장에 다니던 아내의 퇴직금, 자기가  벌어놓았던 돈 등 모든 재산이 탕진되었다고 한다.
“다시 하라 하면 못할 겁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땅도 형제간에 분할이 되어서 재구입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석 대표는 지금까지 했던 일을 다시 하라 하면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 산을 돌아다니다가 만난 야생 잔대. 잔대는 뿌리는‘사삼’이라 하여 예로부터 인삼, 현삼, 단삼, 고삼과 함께 다섯 가지 삼의 하나로 꼽아왔으며 민간 보약으로 널리 썼다. 특히 인삼과 비슷한 약효가 있다.
석 대표는 땅을 구입하면서 처음에 여기에다가 염소를 길렀다. 욕심을 내서 300마리를 길렀다. 산 속인데다가 짐승도 없어서 그냥 방목을 했다. 그런데 완전히 망했다.
“제 생각에 300마리를 방목을 하면 이 놈들이 새끼를 낳아서 다음해에는 600마리, 그 다음해에는 1200마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과는 그 반대였어요. 오히려 개체수가 줄어드는 겁니다. 이유를 몰라서 동물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동물들은 한정된 땅에 살 수 있는 개체수를 저절로 조정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염소들이 임신도 하지 않고 그랬던 겁니다.”
동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석 대표는 염소를 방목해 놓으면 자기들이 스스로 커서 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한 오산이었다. 그리고 염소로 돈을 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염소로 돈을 벌려면 염소를 잡아서 고기로 팔던지, 아니면 중탕을 해야 하는 데 석 대표는 그것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하려고 해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석 대표는 그래서 남은 염소를 모두 팔아치우고 말았다.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 석 대표 농장 주변 야산을 둘러보다가 만난 3~4년 된 초오. 이 약초는 미나리아재비과의 투구꽃 계열인데 꽃이 아름답다. 독초로 사약의 원료가 된다. 몸을 따뜻하게 하거나 구안와사를 고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당귀와 천궁 농사도 절반의 실패로 돌아가

염소 농사가 실패한 후 석 대표는 2만3천 평이라는 넓은 땅에다가 천궁과 당귀를 심었다. 그래서 4년을 키웠다. 이번에는 제대로 돈을 벌어야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절반의 실패로 끝났다.
“2만3천 평에 수만 주의 천궁과 당귀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앉았다 일어나면 풀이 자라는 겁니다. 풀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온갖 고생을 해서 4년간을 버텼습니다. 4년 후 수확을 해서 파는 데 당시는 판매망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매상에게 넘겼는데 대형트럭이 와서 80%를 사 갔는데 나중에 보니 남은 20%를 개인들에게 판게 더 돈이 많았습니다.”
석 대표는 이 경험을 계기로 약초농사를 포기했다. 약초는 대량재배를 해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대량재배를 하려면 노력과 비용이 너무 들어가는데다가 판매망도 시원치 않아 제 값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 지리강활이라는 독초. 지리산에 많이 난다. 모양이 세발당귀와 비슷해 잘못 알고 먹어서 사망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요즈음 지리강활이 강한 항암성분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특허로 출원되어 있다.
그 이후 석 대표는 약초를 재배하지는 않는다. “농장이 넓으니까 약초 씨를 뿌리기는 합니다. 그런데 자라는 약초를 관리하거나 돌보지는 않습니다. 희한한 게 관리하거나 돌본 약초보다 그대로 둔 게 더 건강하고 잘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석 대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경험으로 보면 약초는 재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냥 벌목을 해서 햇빛은 들어오게 한 후 약초씨를 뿌려놓으면 잘 자란다는 것이다. 이것을 밭을 만들고 거름을 하면 약초가 자라도 웃 자라거나 뿌리가 썩어버리거나 해서 쓸모없이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것이다.
그 이후 석 대표는 자신의 농장에 산양삼, 더덕, 곰취, 오미자 등의 씨를 뿌렸지만 관리는 하지 않는다. 관리하지 않고 고객이 찾으면 그 중에서 괜찮은 약초를 캐다가 준다. 그렇게 하니 노동도 적게 들고 마음도 편해 오히려 소득이 이전보다 늘어났다.

▲ 엄청나게 큰 야생 곰취. 석 대표는 곰취도 야생에 자라면 이처럼 큰다고 말했다. 재배해서는 이런 곰취를 절대 만들 수 없다는 석 대표는 곰취는 요즈음 인기가 있어서 돈이 된다고 했다.
농장보다는 자연산 채취로 농사의 방향을 바꿔

그 이후 석 대표는 시간이 많이 났다. 농장을 관리할 필요가 없으니 자연 시간이 많이 나서 석 대표는 쌍재 주변의 산을 중심으로 자연산 약초 채집에 들어갔다.
“원래 이 지역은 약초의 보고였습니다. 왕산, 필봉, 고동재, 오봉 등이 지리산에서도 약초의 주산지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시호 같은 약초를 캐다가 장에다 많이 팔았습니다. 장사들이 골짝에 사는 아이들을 귀신같이 압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호가 없습니다. 시호는 양지식물이라서 숲이 우거지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쌍재 주변에 약초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년 내내 자연산 약초를 채집할 수 있습니다.”
석 대표는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지리산에 있는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비록 멀리 가지 않아도 약초가 충분했다. 자연산 약초를 캐면서부터 석 대표의 생활도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연산 약초에 대한 수요가 많습니다. 한번 사용해 본 고객은 꼭 연락이 옵니다. 그리고 아무 약초라도 캐다 놓으면 꼭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초는 주인이 있다는 옛 말이 있는 데 실감하고 있습니다. 흔한 약초인데도 꼭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 농장 주변에서 만난 구지뽕 군락지. 예전에는 구지뽕은 쓸모가 없어서 베어버렸으나 요즈음은 혈압, 당뇨 등에 좋다는 이야기에 가장 인기 있는 약재다. 열매를 효소로 먹기도 하고 줄기나 뿌리를 달여서 먹기도 한다.
석 대표는 일 년 내내 자연산 약초 캐는 일에 바쁘다고 한다. 인터뷰를 한 날도 산에 가 있을 예정이었다.
석 대표는 봄에는 약초들이 싹이 트기 전에 캔다고 한다. 봄에는 하수오, 우슬, 도라지 칡 등을 캐고 여름에는 주로 효소를 담기 위해 잎을 채취한다. 요즈음은 엉겅키 효소가 인기가 좋다고 한다. 가을에는 열매를 따서 효소를 담는데 마가목, 헛개나무 열매인 지구자등을 채취한다. 겨울에는 삽주, 잔대, 봉삼, 더덕 등을 주로 채취한다.
“요즈음 제일 인기가 좋은 것은 구지뽕 효소입니다. 혈압을 낮춰주고 당뇨에도 좋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 자연산 구지뽕에 대한 수요가 많습니다. 저는 약성은 잘 모릅니다. 고객들이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는 게 저의 일입니다. 또 느릅나무 뿌리인 유근피도 요즈음 많이 찾는 약초입니다. 자연산 느릅나무가 농장 주변에 많아 포크레인으로 팔 수 있어서 양이 많은 편입니다.”
석 대표는 약초는 유행을 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방송이나 신문에 한번 나면 우루루 그 약초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했다. 석 대표 자신은 약초의 약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이 고객들이 캐 달라는 것을 캐 준다고 했다.

▲ 석 대표의 더덕밭. 씨를 뿌려 놓고는 관리를 하지 않아서 제 멋대로 자랐다. 5년이 되었는데 석 대표는 내년에는 옮겨 심어야 겠다고 했다.
앞으로 산이 대세, 다시 한다고 해도 산으로 가겠다

석 대표는 산을 사서 실패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도 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약초는 산이 맞다,고 생각해요. 나무도 그렇고 약초 풀도 그렇고 산에다가 심어야 합니다. 많이 키울거라고 제초제 쓰고 비닐하우스 만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서는 약초 효능도 문제이지만 그것보다는 약초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석 대표는 약초농사를 짓기 보다는 산을 잘 골라서 약초 씨를 뿌려 놓으면 이게 시간이 가면서 돈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애써 농사를 짓기 보다는 자연과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게 약초귀농이라고 했다. 석 대표는 약초귀농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바삐 서두르다가 이도저도 안될 수가 많다고 했다.

▲ 야생 느릅나무. 역시 요즈음 인기 있는 약재이다. 느릅나무의 뿌리껍질을 유근피라고 하는 데 주로 종양을 빨아내고 새살을 돋아나게 하는 작용에 좋은 걸로 알려져 위궤양 등 많은 궤양에 사용한다.
“저도 많은 실패 뒤에 지금은 5만평의 산에다가 이것 저것 많이 뿌려 놓았습니다. 씨만 뿌려 놓지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노동력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중에서 많은 약초들이 제대로 자랍니다. 이것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나지요. 약초 농사는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석 대표는 또 약초농사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약초를 대량으로 생산해서 판매하기 보다는 작은 양이라도 좋은 것을 판매하다보면 단골이 생기고 나중에 알찬 소득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약초꾼 후계자를 키울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생각이 없다, 고 했다. 약초꾼은 태어나는 것 같다는 게 석 대표의 지론.
“약초꾼은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가르쳐도 모릅니다. 아내는 부산에서 자라서 그런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호박잎과 참외 잎을 구분을 잘 못해요. 그것처럼 재능이 없는 약초꾼은 눈 앞에 두고도 그게 약초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가르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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