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홍화원 김수한 대표
<11>홍화원 김수한 대표
  • 정리 한송학·사진 이용규기자
  • 승인 2013.07.16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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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홍화원 운영해 홍화를 대중에 전파

▲ 김수한 대표는 17년 전 홍화원을 만들어 홍화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김 대표가 홍화원을 만들게 된 것은 아내 강미연 여사가 발을 다쳐 홍화를 먹고 나은 것이 계기가 됐다.
진주서 3번 국도를 따라 산청으로 가다보면 둔철산 입구에 홍화원이 있다. 꼭 국도변의 휴게소처럼 보인다. 그런데 휴게소는 아니고 홍화를 테마로 한 약초와 약초음식을 파는 곳이다. 이 홍화원은 삼성생명에 근무하던 김수한 대표가 97년 열었다.
지금은 홍화원으로 인해 홍화가 워낙 사람들에게 알려져 대중적인 약초가 되었다. 그러나 김 대표가 홍화원을 열 때만 하더라도 홍화는 일반에게 그렇게 알려진 약초가 아니었다. 물론 홍화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뜬 사람도 있다. 인산죽염으로 알려진 인산 김일훈 선생은 홍화를 죽염, 산삼과 함께 3대 신약이라고 칭했다. 그만큼 홍화의 약성이 좋다는 의미이다.
또 홍화는 그 꽃의 색깔이 아름다워 염색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빨간 빛을 내는 홍화는 빨간색 염색재료로 우수했고 또 여인들의 연지 곤지의 재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홍화가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었지만 김 대표가 홍화원을 열 때만 하더라도 일반인은 홍화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홍화가 알려져 있지 않다보니 가격도 비쌌다.
“제가 처음 홍화원을 운영할 때 홍화가 100g에 15만원 할 정도로 비쌌어요. 지금은 홍화환 한달치가 250g 한통에 3만원 할 정도로 가격이 내렸습니다.”
이렇게 김수한 대표의 홍화원은 홍화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삼성생명서 16년간 직장생활 후 홍화원 창업

김수한 대표는 홍화원을 열기 전에는 삼성생명에서 보험을 했다. 그런데 삼성생명에서도 김 대표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김 대표가 삼성생명에 입사한 것은 81년 8월이었다. 그런데 1년 만에 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격이었다.
“소장님이 저를 잘 보신 것 같아요. 당시 거창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1년 만에 함양소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거창이 고향인 김 대표는 삼성생명의 거창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1년만에 함양소장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김 대표는 그 이후 거제장승포 소장과 남해소장을 거쳐 진주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진주사무소에 발령이 난 것이 87년 7월이었다.
진주사무소 근무는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삼성컵 테니스 대회에 삼성생명 대표로 출전한 것이었다. 삼성생명에 입사해 테니스를 배운 김 대표는 남다른 운동실력으로 생명내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노동조합의 춘투가 한창일 때 삼성컵 테니스 대회가 열렸다. 회사에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생명에서는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주원홍씨를 테니스 감독으로 영입해 훈련을 시켰다. 김 대표는 삼성생명의 대표로 뽑혀 삼성컵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합숙훈련을 했다. 서울에서 방 얻어 놓고 2달씩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한남동 테니스 코트에서 연습을 해 보기도 했다.

▲ 홍화원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홍화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수한 대표.
삼성생명 테니스 대표로 삼성컵 우승하기도

“이때가 회사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래도 삼성이다 보니 최고로 대우를 해 줬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분을 회사의 감독으로 영입해 훈련을 맡길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줬습니다. 정말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잘 해 주었습니다.”
결국 삼성컵 대회에서 삼성생명이 우승을 했다.
그런데 삼성생명과 김 대표의 인연은 우연한 기회에 끝이났다. 김 대표는 원래 창업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창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97년이었는데 아내가 다리를 다쳤어요. 계단에서 미끄러져 오른쪽 복숭아뼈가 골절상을 입는 사고가 난 거예요. 그런데 그때 함양에 뼈를 잘 본다는 분이 있었어요. 아내의 상처를 만지더미만 홍화를 먹어라, 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아내가 한약방을 하고 있으니 홍화를 알고는 있었지만 발이 삐인데 홍화를 먹을 생각은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분의 말씀대로 한 달 정도 홍화를 먹었더니 뼈가 다 붙어서 씻은 듯이 나은 것이예요. 아내도 저도 놀랐지요. 홍화의 효과가 그렇게 좋은지 저도 아내도 처음 알았어요.”

▲ 홍화꽃 . 홍화는 뼈에 좋은 약초이다. 매년 6월에 수확을 하는 데 꽃은 노란색이었다가 빨간색으로 변한다. 홍화꽃은 빨간색으로 변했을 때 수확을 한다. 홍화꽃은 짧은 시간에 아름답게 피었다가 진다.
아내 다리 다쳐 홍화로 고친 것이 인연

그때는 홍화를 먹는 법이 개발되지 않아서 그냥 홍화씨를 사다가 볶은 다음에 찧어서 씹어먹는게 고작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먹었는데도 복숭아뼈가 붙는 것을 보고 한약방을 하는 아내가 더 놀랐다고 했다.
김수한 대표의 아내인 강미연 여사는 산청에서 강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한약사이다. 평소에 한약을 다루고 있었지만 홍화가 이렇게 효과가 좋은 줄은 처음 알았다는 게 김 대표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자신이 직접 홍화의 효과를 체험해 본 후 강미연 여사는 무릅이나 허리 아픈 사람에게도 홍화를 시험해 보았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김 대표는 홍화를 본격적으로 취급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홍화의 효과를 직접 눈으로 보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홍화 공장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땅을 보러 다녔지요. 그런데 좋은 땅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지금은 산청군 감사실장을 하는 장근도 실장을 만나게 돼 지금의 홍화원 땅을 소개 받았어요. 그게 오늘날 홍화원이 있게 된 계기입니다.”
김 대표는 진주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홍화 공장을 진주에다 지으려고 부지를 물색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안 당시 산청군 공정개발계장을 하던 장근도 현 산청군 감사실장이 왜 산청에서 나오는 약초로 공장을 하려고 하면서 진주에다 공장을 지으려고 하냐면서 지금의 땅을 소개해 주었다.

▲ 홍화꽃잎. 빨간색을 내는 염색재료가 되기도 하고 여성들의 생리통에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홍화꽃은 어혈을 풀어주는 기능이 탁월해 여성생리통 해결에 쓰면 좋다.
산청군 장근도 실장 추천으로 현재 터 잡아

“장근도 당시 계장이 산청에 공장을 지으라고 하면서 현재의 땅을 소개해 주는 것이예요. 그때가 97년 중반기였는데 98년부터는 이 땅이 수변구역으로 묶이게 돼 있던 땅입니다. 그래서 97년 내에 공장을 짓지 않으면 98년부터는 공장을 지을 수 없는 곳이었어요. 장 실장의 추천에 두말 하지 않고 마음의 결심을 하고 땅을 구입했어요. 당시 평당 16만원으로 당시 시세로는 비싸게 샀습니다. 모두 1700평 정도 됩니다”
김 대표는 해가 가기 전에 공장과 건물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땅 값도 달라는 대로 주었다. 그래서 시세보다는 비싸게 샀지만 그래도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사업을 시작했다. 산청군에서도 행정처리를 일사천리로 해 주었다. 산청군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97년이 가기 전에 건물을 완공하지 못하고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김 대표의 회고. 90평의 홍화제조 공장을 비롯해서 판매동, 식당 등이 들어서 홍화원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홍화원이 탄생하게 됐다.
그때부터 김 대표는 산청지역에 홍화를 수매했다. 계약재배를 통해 홍화를 사 들이는 데 가장 많이 수매할 때는 23톤까지 수매한 적이 있을 정도로 홍화가 인기를 끌었다.

▲ 홍화제품 제조 공장 내부 모습.
산청에서 재배되는 홍화는 전부다 수매해

“산청에서 재배되는 것은 손해가 나더라도 전량 수매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6톤이 남아서 다른데 손해를 보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신용을 위해 산청에서 재배한 것은 다 수매를 했습니다. 그런 정책이 오늘날 홍화원의 명성을 얻게 된 계기가 됐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대표는 아무리 어려워도 홍화를 재배하는 농가에게 그 어려움을 떠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도 수매를 하는 그런 정책을 취했다고 했다. 현재는 연간 10톤 정도에서 안정적인 판매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현재는 연간 10톤 정도의 홍화로 홍화환과 분말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2012년의 경우 인진쑥, 산수유, 느릅나무, 민들레 등을 합쳐 5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큰 매출은 아니지만 알뜰하게 경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홍화원은 연간 매출 5억 원 정도로 규모가 큰 기업은 아니지만 알뜰하게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는 공격적인 경영보다는 성실하게 경영하는 게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했다.
“저는 유통을 하지 않습니다. 유통을 하면 매출은 늘릴 수 있지만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홍화원에서 판매하는 것 보다 유통을 하게 되면 가격이 2~3배는 비싸게 됩니다. 그래서 유통하는 사람들이 제품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습니다. 저는 우편주문, 홈페이지 판매와 이곳의 매장과 동의보감촌 박물관 매장 이외에서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 홍화로 만든 제품. 홍화 제조공장을 통해 매년 10톤 정도의 홍화를 원료로 홍화분말, 홍화꽃, 홍화환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유통조직을 통해 홍화제품 판매하지 않아

김 대표는 홍화를 판매하면서도 원칙이 있다. 대량판매를 위해 유통회사를 활용하지 않는 것. 또 판매를 할 때는 현금판매를 원칙으로 한다. 물량도 100만원 이상은 주지 않는다. 또 판매대금을 받지 못해도 절대 전화를 하지 않는다. 이런 몇 가지 원칙은 김 대표가 홍화원창업이래 지켜오는 원칙이다.
“다른 사람들은 저보고 너무 안일하게 사업을 한다고 말해요.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차근차른 하는 것이 제 성격에 맞습니다. 한때 사업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떠 벌리면서 사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약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 대표는 홍화원 시작 후 크게 실패해 본 경험이 없다. 무리하게 경영하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실패를 줄일 수 있었던 거 같다는 게 김 대표의 분석이다. 김 대표는 홍화원을 열은지 17년이 됐지만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홍화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동의보감촌 기업인 협동조합 만들어

김 대표는 올해 들어서는 자신의 창업경험을 나누기 위해 ‘동의보감촌 기업인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산청에서 한방산업을 경영하는 40여 기업인들이 모여 서로간의 어려움도 나누고 공동사업도 전개하기 위한 목적이다. 김 대표는 “산청은 군과 의회 연구소 기업인들이 유기적으로 협조가 잘 되기 때문에 약초기업을 하기에는 전국에서 최적의 장소”라고 강조했다.        

▲ 김수한 대표가 개발해 시판하고 있는 홍화차.
간편하게 마시는 홍화차 음료 개발

김수한 대표는 최근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개발 동분서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홍화차를 개발해 시판에 나서고 있는 것. 홍화차는 공급처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한 병에 1500원 내외에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다. 일반음료에 비해서는 조금 비싸다.
“홍화는 골다공증이나 뼈에 좋아서 평소에 음료로 마시면 건강을 챙길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 들어서 골다공증에 대한 염려가 많아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홍화차를 평소에 마실 수 있도록 개발했습니다.”
김 대표는 일반인들이 홍화씨를 사다가 음료를 만들어 먹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홍화차를 개발했다고 말했다. 홍화차에는 홍화가 9.3%가 들어가 있다. 일반인이 상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양이다. 일부 민감한 사람들은 오히려 홍화비율이 많을 정도이다. 따라서 홍화차만 지속적으로 마셔도 뼈와 관련된 질병의 예방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병에 1500원 비싸지만 몸에 좋아

이런 생각에서 홍화차를 개발해 시판에 나섰지만 김 대표는 음료시장이 만만치 않음을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다.
“홍화차를 개발해 지난 4월1일 15만 병을 출시했습니다. 원래는 엑스포 때 팔려고 생각했는데 반응을 보기 위해 시중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화원은 소기업이다 보니 유통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모든 곳에 홍보를 하고 배달도 직접 합니다. 그런데 중소기업이 음료시장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을 정도로 음료시장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제가 17년 사업한 것 보다 홍화차 시판하면서 배운 게 더 많습니다.”
김 대표는 대기업의 밀어내기 등이 왜 생기는 지 이해가 갈 정도로 음료시장이 쉽지 않은 시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홍화차는 15만병 만든 것 중에서 10만병 정도를 이미 팔았다. 이제 5만병 정도 남았는데 엑스포 때 사용할 물량이 없어서 다시 15만병을 더 만들어야 할 정도이다.

음료시장 대기업 장악 도전 쉽지 않아

“반응은 일반 음료에 비해 좋습니다. 그러나 홍화차로 돈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선 노동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납품처 개발을 비롯해서 배달 등 제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홍화차로 홍보와 마케팅,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기에는 수익성이 담보가 되지 않습니다. ”
김 대표는 홍화차의 반응이 좋아서 한번 구매해 보면 다시 사게 된다고 말했다. 중규모의 기업에서는 사원복지 차원에서 구매하기도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전언.
그러나 김 대표는 아직 홍화차에 관해서는 연구할 분야가 많다고 했다. 우선 홍화 포함비율이다. 현재 출시되는 것은 홍화비율이 9.3%나 돼 수익성을 맞추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런데 낮출 경우 과연 약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등이 걱정된다.
그래서 수익성을 포기하고 약효를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홍화포함비율을 고집하고 있다. 그런데 대중화를 위해서는 홍화포함비율을 낮추는 것 등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분석.
김 대표는 앞으로 홍화차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대기업에 납품하는 형식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독자적인 길을 걸을 것인지를 두고 선택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 대기업과 손을 잡으면 홍화차는 활성화 되겠지만 과연 그것이 건강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가 의문이고 독자적으로 할 경우 과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선택앞에 놓여있다는 게 김 대표의 이야기이다. 과연 김 대표가 어떤 선택을 통해 홍화차의 대중화를 열지 귀추가 주목된다.  

▲ 김수한 대표가 경영하고 있는 홍화원은 90평의 홍화제조 공장을 비롯해 판매동, 홍화전문 음식점 등이 들어서 모두 1700평 규모를 갖추고 있다. 홍화원은 산청과 지리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이다.

김수한 대표와 아내 강미연 한약사의 만남

김수한 대표의 아내인 강미연 여사는 산청에서 강한약방을 경영하는 한약사이다. 강미연 원장은 1983년 한약사 시험에 합격해 산청에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다. 강한약방은 김수한 대표의 장인인 강무성옹이 설립했다. 강미연 원장은 산청에서 대를 이어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것.
김수한 대표가 아내 강미연을 만난 것은 테니스로 허리를 다쳐 치료를 받으러 강한약방을 드나들면서 부터였다.
“83년 삼성생명 함양소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회사에서 테니스를 치다가 허리를 다쳤어요. 그래서 병원에도 가보고 침도 맞으러 다녔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100군데도 더 다녔을 겁니다. 그래도 허리가 차도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하는 말이 산청에 할아버지가 있는데 잘 하신다는 거예요.”
그 할아버지가 나중에 장인어른이 된 강무성 옹이다. “그래서 지금의 강한약방을 찾아갔지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젊은 아가씨만 한약방에 앉아있는 거예요.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이왕 온 거니까 증상을 얘기했지요. 그랬더니 아가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슨 약을 주는 데 6개월만 먹으면 낫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침으로도 안 되는 병이 약으로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긴가민가 하면서 약을 먹는데 3개월 먹으니까 허리가 씻은 듯이 나았어요. 정말 신기했지요. 허리 다친지 1년 2개월 동안 침 맞으러 다니면서 허송세월만 한거예요. 그렇게 인연이 돼서 결혼을 하게 됐어요.”
김 대표는 아내 강미연원장과 결혼한 것이 자신의 허리를 고쳐 준데서 인연이 시작됐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김 대표는 자신의 허리를 고쳐준 약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글쎄 제 생각엔 혈액순환제가 아닌가 생각되어요. 원래 장인어른은 어떤 병에도 혈액순환제를 처방하셨거든요. 장인어른은 피만 좋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래서 감기환자가 와도 두통환자가 와도 허리병 환자가 와도 혈액순환제를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 생각엔 제 허리병을 고친 약도 혈액순환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집 식탁에는 늘 혈액순환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강 한약방에서 처방하는 혈액순환제는 한달치 약 값이 2만원이다. 약값을 올리지 말라는 강무성 옹의 지시 때문이다. 그래서 30년 전에 2만원 하던 약값이 지금도 2만원을 받고 있다고 했다. “지구상에는 물만 깨끗하면 되고 사람 몸에는 피가 잘 돌면 병이 없다”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던 강무성 옹은 지난 6월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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