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韓非)의 창(矛)과 방패(盾)
한비(韓非)의 창(矛)과 방패(盾)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5.3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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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기원전 230년경 완성된 책.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진의 시황제에 제공한 반(反) 유가의 선봉이자 법가의 제일인자이다.
‘한비자’는 한(韓)의 귀족이었던 한비의 저작. 순자의 문하에서 배운 뒤, 조국 한의 발전을 원해 법가 사상을 발전시켰다. 본래는 인명, 서명 모두 ‘한자(韓子)’라고 했지만, 당(唐)의 한유(韓愈)가 한자(韓子)라고 불렸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려고 한비자라고 한 것이다.

‘사기’의‘한비전’에 의하면 한비(기원전 ?~기원전 233)는 한(韓)의 서공자(庶公子)로 태어났다. 한나라는 전국 칠웅의 하나로 꼽혔지만, 국토는 좁고 중원에 위치해 강국인 진(秦)과 초(楚)의 압박으로 그 존립을 위협받고 있었다. 한비는 부국 강병을 위한 학문을 익히기 위해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 순자(순황)의 밑에서 공부했다.

같이 공부한 사람에는 뒤에 진의 재상이 된 이사(李斯)도 있었다.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 노자의 무위 사상으로부터 철학적 계시를 받고 그 속에서 상자(商子 : 상앙)의 법(法)과 신불해(申不害)의 술(術)등을 종합해 독특한 통치 이론인 ‘법술(法術)’을 짜냈다.

한비는 이 ‘법술’이야말로 부국 강병을 유일한 도라고 한왕(韓王)에게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한나라에는 천하 통일을 노릴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한비의 법술을 채용한 사람은 진왕(秦王)정(政 : 뒤의 시황제)이었다. 정은 수시로 한비의 저술을 읽고 감탄하여 어떻게 하면 지은이를 만날 수 있을지 전전긍긍했다 한다. 마침내 이사가 계책을 세워 진이 한을 공략하자 과연 한나라는 한비를 사자로 삼아 화해를 청해 왔다.

진왕은 한비를 불러 들렸지만 즉시 등용하지는 않았다. 한편, 이사는 예전의 동학으로서 한비의 능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만큼 그가 등용 될 경우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 떨떠름했다. 그래서 그는 동료 요가(姚賈)와 함께 진왕에게 한비를 모함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었다. 이사가 옥중에 독을 보내자 한비는 스스로 독을 마셔 버렸다고 한다. (기원전 233)

그 3년 뒤에 한나라는 멸망하고 다시 10년 뒤 진의 천하 통일이 이루어져 정(政)은 시황제를 칭한다. 시황제의 정책은 전부가 한비의 생각에 연원을 두고 있으니, 사실상 시황제는 한비의 제자인 셈이다.
‘한비자’는 모두 55편이다. 한비가 실제로 썼는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전체적으로 법가 사상으로 통일되어 한비의 주장을 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본서에 나타난 많은 명언 중에 가장 유명한 명언은 바로 모순(矛盾)인데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은 옛날 초나라에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는 우선 방패를 꺼내, “이 방패는 어떤 것으로 찔러도 뚫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에 창을 꺼내 “이 창은 어느 것도 뚫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러면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상인은 대답이 궁했다고 한다. 이 비유는 한비가 유가의 주장을 반박할 때 사용했다.

 유가는 고대의 성왕 순(舜)을 칭송해, “요(堯)가 천자였을 때 순은 스스로 각지에 나아가서 노동을 실천해 모범을 보였고, 사람들의 다툼을 그치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성인의 덕의 힘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에 대해서 한비자는 “요가 성인이라면 천하는 완전히 잘 다스려져서 순이 등장할 장이 없어야 한다. 한편 순이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한다면, 요에 실정이 있는 것이 된다. 요를 성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 비유를 써서 요와 순 어느 누구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의 설’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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