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장이 아닌 그려진 그림에 그림그리기
백지장이 아닌 그려진 그림에 그림그리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8.1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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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환/부산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지금까지 우리는 도시의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분하에 기존에 있던 모든 자원을 모두 소거하고 백지장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접근하였다. 이러한 전면 철거방식의 도시환경 개선은 사업의 추진 과정 측면에서 매우 편리한 방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 곳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자산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 곳만의 고유한 특성도 함께 사라짐으로써 장소성의 상실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장소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를 간과한 백지장위에 그림그리기 식의 접근방법은 우리의 도시나 마을이 과거와 현재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미래의 모습을 기대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다. 또한 이러한 방법은 시민들로부터 자신이 속한 도시나 마을의 가치나 애착 그리고 자부심을 빼앗아가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기존의 가치 있는 자원 낭비라는 경제적 손실을 함께 유발하게 된다.
도시나 마을에는 시간이 누적된 자원들과 시민이나 주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원들이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앞으로 실천하게 되는 장소만들기는 이러한 자원을 발견하여 시민(주민)들과 그러한 자원의 가치를 함께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 도시나 마을의 재생전략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마을의 허름한 골목길이라도 주민들이 애착을 가지는 곳이 있기마련이다. 그곳에는 그들의 옛 추억과 오늘의 삶이 담겨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은 공간적으로도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전문용어로는 휴먼스케일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아늑함을 제공하는 곳일 수도 있다. 이러한 곳에 새로운 개선을 추가하고자 할 때는 그곳에 부여하는 주민들의 정서적 가치들을 먼저 발견하고 그것들을 강화하는 수 있는 장치를 덧붙이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다. 즉 그려진 그림위에 새로운 그림을 덧붙여 그림으로써 기존의 그림 가치를 더욱 강화하거나 새롭게 추가하는 방식인 것이다.
 도시나 마을에 있는 기존의 자원들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물리적 환경이 시민들에게 하나의 장소가 되어 내밀하게 경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의 문화를 고려하여야 한다. 한 집단의 생활양식인 부분문화를 무시한 물리적 환경개선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중 대표적인 한가지 사례가 미국에서 건축상까지 수상했던 푸르이트 이고(Pruitt Igo) 집합주거단지 일 것이다. 미국의 중산층 문화에 익숙했던 건축가 미로누 야마사키(Minoru Yamasaki)에 의해 설계된 이 주거단지의 실제 거주자는 흑인을 포함한 저소득층이었다. 이 설계자는 입주민의 계층과 그들의 생활양식인 부분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한채 이상적인 설계안을 제시함으로써 향후 입주민의 커다란 불편과 불행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좋은 의도로 제안한 ‘갤러리’가 쓸모없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심지어는 청소녀의 비행 공간으로 변질되어 이 주거단지를 떠나는 주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주민들은 이 아파트를 폭파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실제로 건물을 폭파하는 지경에 이르는 불행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사례는 도시나 마을 개선하는데 있어 그들의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다시생각하게 한다.
기존에 시민 혹은 주민들이 소중히 하는 자산이란 그들의 생활문화를 반영함으로써 그곳의 장소성을 형성시켜주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도시나 마을의 환경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이러한 자산을 발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의 문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발견하고 함께 인식하여 새로운 개선 작업에 포함될 있도록 함으로써 그 곳의 장소성 강화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장소성 강화방식의 실천은 특정 도시나 마을에 대하여 ‘그곳을 그곳이도록 함’으로써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할 수 있고 ‘그 곳 물리적·사회적·경제적으로 유지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확보하게 되어 궁극적으로 경쟁력있는 도시나 마을을 만드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제 마을이나 도시를 개선하는 첫 단추로 장소성 있는 자원을 발견 혹은 발굴하고 이러한 가치를 함께 인식할 수 있도록 실천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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