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꿈, 그리고 대한민국의 꿈
발해의 꿈, 그리고 대한민국의 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3.0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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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국학원장·전국민족단체 연합회 대표회장

한 나라와 민족의 삶에 대한 통찰은 그들의 철학이 되고, 그 철학이 이어져 오면서 나라의 흥망성쇠는 역사가 된다. 역사란 강자의 편에서 기록 되는 것이지만 변 할 수 없는 가치는 민중의 문화가 되어 저변기층으로 이어져 온다. 역사는 나라가 바뀌면서 굴곡 되어 왔지만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민족의 철학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며 변치 않는 기층문화를 이루어 도도히 흘러오고 있다.


서기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자 서압록(서요하)지역을 수비하던 대중상(大仲象) 장군은 아들 대조영 장군과 8000여명을 이끌고 동모산 쪽으로 동진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중광(重光)이라는 연호를 쓴다. 서기 699년, 대조영(大祚榮)이 뒤를 이어 발해(渤海, 大震國)를 세우고 천통(天通)이라는 연호를 쓴다. 고구려가 망한 지 약 30년 만에 드디어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 황제는 건국하자마자 그 동생 대야발(大野勃, 반안군왕)에게 고구려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민족의 “고서(古書)들을 복원하라”는 명을 내린다.

대야발은 형이자 황제인 대조영의 명을 충실히 받아 13년에 걸쳐 머나먼 돌궐을 2번이나 방문하여 국조 단군(檀君)으로부터 고구려,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천손대대로 계승되어 온 계통을 바르게 세웠다. 이에 대조영 자신은 단군왕검 때부터 전해온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찬양문을 짓고, 대야발은 서문을 짓고, 개국공신으로 현재 문화부와 교육부장관 격인 문적원감 임아상(任雅相)은 주해를 달았다. 대조영이 죽자 서기 719년 대무예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뒤를 이어 자타가 우러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루었다.

그가 붕어하자 서기 737년 대흠무는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하여 황제의 자리를 오르고 문치와 무위를 떨쳐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에 전하는 이때의 기록을 보자.

“태자 흠무가 즉위하니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기고 이듬해엔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무위 는 여러 주변 족속을 복종시켰다. 이에 동방의 현묘지도가 백성들에게 흠뻑 젖어들고 홍익인간의 교화는 만방에 미쳤다”

고구려를 모두 다물(多勿)하여 수도가 5곳으로 그 영토가 고구려의 2배가 되었고, 당, 신라, 왜가 조공을 바친 해동성국 대진국(발해)의 위용은 모두 일찍이 위, 아래가 합심하여 국사를 바르게 세운 덕분이다. 이렇듯 대진국(발해)은 220여 년간 15왕조에 걸쳐, 고구려의 고토와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나라였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진국(震國)의 부족 하나가 금(金)나라가 되고, 금나라가 청(淸)나라가 되었다고 밝혔다. 청의 개국시조 누르하치와 마지막 황제 부의까지 청나라의 황제를 비롯하여 극소수의 황족들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이 아닌가. 근세조선의 지도자들은 역사를 바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바로 가르치지도 않으매 오직 다른 민족인 명(明)나라에 빌붙어 나라를 지키려 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으로 오히려 친족인 청나라에게 호되게 당한 삼전도의 치욕과 병자호란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자는 반드시 미래를 잃게 되는 법이다. 우리나라 교수들이 올해의 바람을 담은 사자성어인 ‘전미개오(轉迷開悟)’는 ‘미망에서 돌아 나와 깨달음을 얻자’는 뜻이다. 어떤 선택이 국력을 신장하고 세계를 살릴 것인가. 정치권, 학계, 국민들이 과감하게 작은 나의 미망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부디 올해는 1300여년전 발해의 지도자와 백성처럼 대동합심으로 ‘변화’ 하여 하늘을 나는 천마처럼 비상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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