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인연
친구의 인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3.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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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누군가와 인생의 어느 시간을 보내는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깊은 인연이라면 가족 간의 혈연(血緣)도 있고, 부부간의 인연도 있다. 그렇다면 친구 사이에는 어떠한 인연이 있어 무료한 인생을 동반하는 것일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한 벗과의 인연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옛사람은 벗을 중시하였고, 그와의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정조 때의 문호(文豪)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벗과의 인연을 이렇게까지 말한 일이 있다. 「공교롭게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뒤에 나지 않아서 한 세상 같이 태어났고,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匈奴族)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南蠻) 사람이 아니라서 한 나라에 같이 태어났으며,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 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武人)이 아니요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서 함께 선비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구차하게 같거나 행하는 일이 구차하게 맞아 떨어진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과 친구하고, 백 세대 뒤에 사람을 미혹(迷惑)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경보(敬甫)라는 친구에게 보낸 답장편지의 전문(全文)이다. 친구가 벗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나 보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은 참으로 보통의 인연이 아니고 보통의 만남이 아니다. 수천 년 흘러온 세월 속에서 지구의 수십억 인간 가운데 하필이면 그 사람을 벗으로 만나 사귀다니! 그야말로 우주상에 일어난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마을, 같은 신분의 친구가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그와 친구가 되었다는 기막힌 인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당시 선비들은 친구와의 사귐을 서로 깊이 감사할 줄 알았다.

또한 정조 때의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역시 친구와의 기이한 만남을 기록한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에서 「먼저 나지도 않고 뒤에 나지도 않아 한 세상에 함께 태어났구나! 남쪽 땅에 나지도 않고 북쪽 땅에도 나지 않아 한 마을에 함께 사는 구나! 느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천지여! 부모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不先不後 幷生一世 不南不北 同住一鄕 可感可悅 天地父母 多謝多謝).」라고 하였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의 인연에 대해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듬뿍 전해진다. 이 글을 보고 나면 좋은 친구들과 사귈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친구와의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연암은 인연에 감사를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편지의 끝 대목에서 기묘한 인연으로 만난 벗이라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나누는 대화, 함께하는 행동이 구차하다면 차라리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인(古人)을 사귀고, 수백 년 뒤에 벗에게서 자신을 확인하겠다고 덧붙였다. 고독하게 책 속에서 벗을 찾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왜일까?

진정한 친구란 그저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친구라면 함께 하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가 천박(淺薄)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함께 하는 행동이 더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의기투합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친구는 아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주변에는 친구와 가족, 부부 사이에서 서로 만난 것을 원수로 알아 등을 돌리고 헤어져 살던 곳을 뜨는 일들이 적지 않다. 현대 사회에 살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때가 더러는 있으리라. 그러나 사소한 만남도 기묘한 인연의 소산이다. 내게 친구가 있으니 천지여 부모여 감사! 감사! 하다고 머리를 꾸벅거리는 선인(先人)의 마음을 가져볼 일이다.

당(唐)나라 때 대문호(大文豪) 한유(韓愈)의 시구(詩句)가 다시 뇌리를 스치는 구나! 「젊은이는 새 벗을 즐겨 사귀고, 늙은이는 옛 벗만 그리워하네(少年樂新知 衰暮思故友)」! 인생 노년기에 천박하지 않는 친구 몇 두었으니 참 다행이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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