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역사적인 날들
4월의 역사적인 날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4.1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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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경남국학원 이사
 

● 4,13일 임시정부 수립일

거국적인 3,1운동으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강화되자 뜻있는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1919년 4월 13일 상해(上海)에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국내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헌법에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라고 명시되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심에 김구,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도산 안창호, 이회영 형제들 외 열사, 의사들이 계신다.

● 4,14 어천절
어천절(御天節)은 고조선 47대 단군 중 제1대 국조 단군왕검께서 돌아가신 날인 경자년(서기전 2241년) 3월 15일을 기념하는 날로 고려 말 행촌 이암은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辛卯, B. C.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밝달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국조단군이 태어나신 탄강일(誕降日)은 음력 5월 2일이다. 밀양 영남루 천진궁에서는 해마다 탄강일, 어천대제, 개천대제가 열리고 있다.

● 4,19 혁명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가 대대적으로 자행됨으로써 선거 당일에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창원·마산 지역에서 4월 11일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눈에 맞아 숨진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에 분개한 시민·학생들의 규탄시위가 다시 전개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 위한 전국 규모의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 4,28 충무공 탄신일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서울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곧 철수 한다는 정보가 있자, 전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일본군측은 철군준비에 들어갔으며, 명나라는 자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이를 묵인하는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1598년 11월 18일 조명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오는 일본군 함대를 맞아 전투를 벌였다. 치열한 접전 끝에 대첩을 거두었지만, 이순신은 적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고 만다. 하늘의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으니(大星隕海) 성웅 이순신이 54세 되던 해였다.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여 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 4,29 윤봉길의사 의거일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한 날이 밝았다. 이미 공원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의 한 열사는 내외 귀빈들이 보는 가운데 무력을 시위를 사열하는 단상에 수류탄을 던져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는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츠(重光葵) 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면서 이때부터 임시정부를 적극지원 했으며 군대의 정식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사건은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가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을 면면히 이어오게 한 선열들의 인간사랑 나라사랑 정신을 항상 가슴에 품고 홍익인간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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