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허(虛)와 실(實)
논어의 허(虛)와 실(實)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01 1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신웅/

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지리산막걸리학교 교장

선진(先秦)시대의 책에는 위작이 대단히 많으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마땅히 조심성 있게 가려내어 읽어야 한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전승한 보전(寶典)이므로 대개는 믿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후인들이 덧붙이거나 잘못 고쳐 놓은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대개 각 편의 끝에 때로 한두 구절의 원본 아닌 어구가 있다. 예전에는 죽찰(竹札)(대쪽)에 글을 썼으므로 전초(傳抄)와 수장(收藏)이 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편말에 공백이 있으면 왕왕 그 책과 상관이 없는 글을 써넣어 메우는 일이 있었다. 이는 그렇게 하는 본인들로서는 수고를 더는 편의와 비망(備忘)을 위해서 한 일이지 반드시 위문(僞文)을 지으려는 생각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전전하여 전초되는 과정에서 이것을 정문(正文)에 잘못 끼워 넣게 되었으니 주(周)?진(秦)시대의 고서 중에는 이와 같은 일이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논어’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가령‘논어’의 ‘옹야(雍也)’장의 “공자가 남자를 만나다”(子見南子)라는 구절, ‘향당(鄕黨)’장의 “깜짝 놀라서 날아오르다”(色斯擧矣)라는 구절, ‘계씨(季氏)’장의 ‘제경공(薺景公)’이라는 구절, ‘미자(微子)’장의 “주공이 노공에게 말하기를”(周公謂魯公)이라는 구절과 “주나라에 8명의 인물이 있었다.”(周有八士)라는 구절 등은 모두 공자의 문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거나 아니면 문의가 다른 구절과는 동떨어진 데가 있어서 모두 원문이 아니지 않은가 의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작은 문자에 불과하고 최술(동벽(東壁))의 고증에 의하면 ‘논어’ 전20장중에서 끝에 있는 5장, 즉 ‘계씨’?‘양화(陽貨)’ ‘미자’ ‘자장(子張)’‘요왈(堯曰)’은 모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한대 초기에 전하는 ‘논어’원전으로서 ‘노론(魯論)’ ‘제론(齊論)’ ‘고론(古論)’의 구분이 있어서 장수(章數)와 끝의 몇 장의 장명이 각각 다르고 또한 문구도 간혹 서로 다른 것이 있다. 왕망(王莽)때에(A.D.9~22)그의 총신 장우(張禹)가 이 3본의 논어를 합쳐서 1본을 만들어 오늘날 보는 ‘논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5개 장 중에서 적어도 일부분은 전국시대 말년에 함부로 고쳐진 데가 있음직하다.

그 증거로서는 첫째, ‘논어’는 통례로 공자를 지칭할 때에 모두 ‘자’라고 말하고 다만 군주나 대부와 문답한 것을 기록할 때에만 ‘공자’라고 하였는데 이 5개 장 중에는 종종 ‘공자’또는 ‘중니(仲尼)’라고 지칭한 데가 있다.

둘째, ‘논어’에 기록된 문제자(門弟子)와 공자의 대면문답도 모두 공자를 ‘자’라고 불렀다. 대면해서 ‘부자(夫子)’라고 부르는 것은 전국시대 사람들의 말투이고 춘추시대에는 없던 일이다. 그런데 이 5개 장 중에서는 종종 ‘부자’라고 부르고 있다.

셋째 ‘계씨’장에는 “노의 계씨가 바야흐로 전유(?臾)(노(魯)의 소보호국)를 공략하려고 하고 있었다. 계씨의 가신이었던 염유(?有)와 자로(子路)가 공자를 뵙고” 운운하였는데 고증하여 보면 염유와 자로가 동시에 계씨의 가신이었던 일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넷째, ‘양화’장에 “공상불요(公山弗擾)(계씨의 가신)가 비(費)라는 고을을 근거지로 하고 모반했을 때 공자를 부르자 공자는 가려고 하였다.” 운운하였고 또 “불힐(佛힐)(진(晋)의 대부, 범씨의 가재(家宰))이 중모(中牟)라는 고을을 의지하여 모반했을 때 공자를 부르자 공자는 가려고 하였다” 운운하고 있다.

고증에 의하면 불요가 모반했을 때 공자는 바로 노의 사구(司寇)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서서 비를 함락시켰으니 불요는 바로 공자의 정책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며 그 반란은 또 공자의 손으로 평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반란 현령(縣令)으로서 감히 집정(執政)을 초치하며 그 집정이 바야흐로 관군을 지휘하여 적군을 토벌하는 마당에 부름에 응하여 가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등용만 해주면 비록 불요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 밑에 가서 일하여 나의 이상인 동조의 재훙을 도모할 것이다.”(其爲東周乎)라고 말했다고 하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불힐이 중도에서 조(趙)에 모반한 것은 조의 양자(襄子) 때의 일임이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보인다. 조 양자가 제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공자(B.C.551~479)가 죽은 지 5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공자가 어떻게 불힐과 교섭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취지는 모두 최술이 논증한 바로서 대체로 매우 정심(精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본다면 ‘논어’의 십중팔구는 믿을 만한 것이나 그 중에 1내지 2는 후인이 ‘논어’의 이름에 가탁한 위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학자가 마땅히 분별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