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자랑
햇볕자랑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9.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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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자/경남수필문학회 회원
 

지금 살고있는 집은 동남향에다 겨울이 되면 일조량이 많아 햇볕이 마루에 가득하다. 소파에 앉아 가만히 햇볕만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이 평온하다. 간혹 햇볕을 등지고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책을 읽기도 한다. 그야말로 온전히 볕을 즐기면서 읽는다.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올 때는 햇살 따뜻한 겨울 오전이면 더 좋겠다. 햇빛이 거실을 가로질러 식탁너머 싱크대 모서리까지 환히 비추고 있을 때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하다. 햇살이 마음을 토닥거리듯 어루만져 준다.

햇볕은 어떤 가구보다도 우리 집을 빛나고 포근하게 꾸며준다. 최상의 인테리어이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덤이다. 행여 햇볕을 막을까 염려되어 오랫동안 커튼을 하지 않고 살았다. 난방비도 절약되어 햇볕 덕을 톡톡히 본다. 이십 년을 살고도 아직 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에 이 햇볕도 한몫하고 있다.

겨울에 운동하러 산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양지바른 언덕에 앉아 옹기종기 모여 앉아 햇볕을 쬐고 있다. 그 무리에 끼어 들지는 않지만 나도 될 수 있으면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골라가며 걷는다. 하루에 20-30분 정도 햇볕을 쬐는 것이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예방해주며 건강에도 좋다고 들었다.

유난히 햇살이 따끈따끈한 어느 봄날 한 외국인 젊은 남자가 상반신을 맨몸으로 내놓은 채 커다란 개를 곁에 앉혀놓고 산비탈에 앉아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 동네 앞산에서도 이런 광경이 연출되다니,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얼마 전 지인 여러 명이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창원에 살다 울산으로 이사 간 친구 집에 놀러갔다. 그이네도 우리 집과 비슷하게 정오가 되어오는데도 마루에 햇살이 그득했다. 주방 쪽에 붙어있는 작은 방 창 밖으로 태화강이 바라다 보이는데도 아랑곳없이 모두 햇살 따뜻한 마루에 옹기종기 앉아 각자 자기집 햇볕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향집을 가진 친구는 하루종일 햇볕이 들어 수삼을 쪄서 말려 홍삼을 만들거나 곡물, 채소, 생선 등을 말리기에 그저 그만 이라고 했다.

햇볕이 주제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수다가 사금파리처럼 여기저기 떨어져 내려 반짝이고 있었다. 내놓은 오미자 찻잔 안에도 햇살조각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합창단을 통해 오랫동안 인연이 이어져 온,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제 사람이나 사물이나 차가운 것에는 거부감이 인다. 어쩌면 내 성격이나 성향이 차갑기 때문에 온화하고 포근한 것에 끌리는 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 벚꽃이 화사하게 만개한 봄날에 아들이 장가를 갔다. 우리 집에 들어온 새 식구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햇볕처럼 따스하고 달빛같이 부드러운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햇볕이 만물을 영글게 하는 힘이 있듯 아들이 가진 잠재력을 밖으로 발휘할 수 있게 옆에서 돕고 자신도 더불어 빛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밝고 따뜻한 것이 그리웠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남편은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 밤늦게 귀가하여 집은 늘 적막했다. 활동한다는 명목 하에 밖으로 바쁘게 다닌 것도 적적함을 메우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편이었다. 이제 햇살이 집안 깊숙이 퍼져있는 집에서, 사놓고 미루어 두었던 책을 하나 하나씩 읽고 DVD로 좋은 영화도 감상하며, 느리고 안온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려 한다. 소중한 우리 집 햇볕을 충분히 누리며 즐기려한다.

온갖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이다. 햇볕이 얼굴을 따끈따끈 달구고 들판에는 곡식들이 탱탱한 알곡을 만드는 중이다. 릴케의 시 ‘가을날’에서도 달디단 포도주에 감미로움이 깃들 수 있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햇볕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김남조 시인은 가을햇볕에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된다고 했다. 사물의 온기, 사람의 온기로 내 마음이 천천히 익어갔으면, 그렇게 숙성된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하게 전해졌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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