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융무애’한 이치를 알자
‘원융무애’한 이치를 알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09.30 13: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것은 약도 되고 독도된다. 그래서 “약도 없고 독도 없다”


인삼과 녹용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독이 되고 수은(水銀)도 일부 병에 적정량을 사용하면 약이 된다. 밝은 달도 도둑은 싫어하고, 사슴국의 향기도 만인의 구미를 맞을 수는 없다.

친한 친구로 믿었던 사람이 자고나서보니 나를 이용해먹었을 수도 있고, 선업(善業)에도 반드시 악업(惡業)이 동반되고, 때에 따라, 친절함이 유혹의 악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

나에게는 비극적인 일이 남들에게는 희극적일수도 있고, 나의 성공은 남의 패배도 된다.

몸에 조화가 깨져 불편하고 불쾌한 상태면 병이고, 평화롭고 불편 없는 상태는 건강이다. 반편이처럼, 명산 폐묘(名山廢墓)하지 않으려면 마음 밭을 새로 갈아엎어 자신의 일을 위해 살고, 일을 위해 죽을 사명 적 존재가 되어야한다. 농부가 논밭을 갈아 퇴비를 넣듯이 마음 밭을 새로 뒤엎고 지식의 씨앗, 생명의 씨앗을 심고, 손질하며,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자.

질투는 가장 무서운 병이자, 자신을 고문하는 형리다. 질투는 남들과의 비교에서 온다.

비교가 없는 곳에 질투도 없다. 모든 사람이 진리의 말씀이 가득담긴 구구절절 옳은 말씀과 주옥같은 금언과 명구로 가득한 양서를 하루 한 줄씩이라도 읽어나가 보자.

읽고 난후는 읽기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달라져 있어야한다. 불교에는 팔정도가 있고, 기독교에는 인생 팔복이 있다. 이러한 진리의 말씀 속에는 번영의길, 행복의 길이가득 들어있다. 좋은 글, 좋은 말씀을 많이 보고 들어야 정신자세가 새로워진다.

말을 잘하기는 어렵고, 잘 듣기는 쉽다. 글을 잘 쓰기는 어렵고, 읽기는 쉽다.

참깨를 갖고 길다, 짧다, 하지 말고, 쉬운 것부터 실천해보자. 흥한 사람과 망한 사람의 차이는 그 사람의 정신자세에 달려있다. 흥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하고 망하는 사람은 정신이 약하다. 종교는 생활의 부패를 막는 향료다. 성자(聖者)가 한말이라 해서 진리가아니라, 성자는 진리만을 말할 뿐이다. 새침데기 골로 빠진다. 정신혁명을 일으켜야한다. 혁명은작은 일에서 발생한다. “혁(革)이라함은 변혁함을 말함이요, 명(命)이라함은 운명을 가리킴이다”

종교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조용한 해저(海底)이다. 해면은 물결이 높고 험하더라도 그 해저는 조용한 채로 있다. 마음을 깊숙이 가라앉혀 죽음의 문을 통해서까지 영의 세계, 불멸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길을 가야한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며 세상과의 이별이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 할 수밖에 없다. 눈앞의 일을 보고도 상여 메고 가면서 귀청후비 듯, 하지 말고, 성현님들의 가르침을 적극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이시대의 무책임한 구경꾼이 아니다. 새 역사를 창조해나갈 확실한 주인공들이다.

빈손으로 왔다하여 빈손으로 가버리면 이 세대에 살았다고 볼 수가 없다. 빈손으로 왔지만, 보람의 열매와 이 시대에 살았던 흔적과 노력의 발자취를 남겨야한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너다, 나다 하는 상대성 양변을 모두 초월하여 ‘원융무애’한 이치를 알아야한다.

참 진리에 눈을 떠야만 진짜 부자가 될 수 있다. ‘느린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춰있는 것을 두려워하라’ 하였다. 천천히 진리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만 더 순수해져보자. 어린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앵두 같은 입술, 해맑은 얼굴과 웃음 속에는 무서운 것, 부러운 것, 탐하거나 질투도 없는 순결하고 깨끗한 평화의 상징이다. 문제는 꽃도 시들면 추하게 변하고, 깨끗하고 순진했던 어린 아이들도 성장하면서 추하게 변해버린다는 점이다.

모든 인생이 조건부이며, 교환용이지만, 진리의 길에는 변함이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