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조국과 고향사랑 “어려운 사람 도움 주며 살고파”
평생 조국과 고향사랑 “어려운 사람 도움 주며 살고파”
  • 글/김영우·사진/이용규기자
  • 승인 2014.11.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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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사업가 최복순(崔福順) 여사

▲ 최복순 여사가 진주 촉석루에 올라 자신이 11살 때 고향인 단성에서 살수가 없어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부산까지 갔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최 여사는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내려다 보면서 회환에 젖는 모습이었다. “11살 때 어머니를 따라 단성 운리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갔어요. 그때 촉석루에 올라본 적이 있어요. 그게 어제 같은데… 벌써 80년 전의 일입니다.”
올해만 벌써 열 번째 한국을 방문 중인 최복순(89) 여사는 이번에는 시댁이 있는 고성군 양로원에 기부를 하고 하동 옥종 안계리의 조상 묘소를 돌보고 진주로 오는 길이었다. 안계리에 있는 묘소를 윤상기 하동군수가 잘 손질해 놓았더라고 흐뭇해 하였다. 그런데 조카들이 묘소단장에 나오지 않았다며 다시는 묘소를 단장하는데 돈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은 일본에서 여기까지 나와서 묘소를 돌보고 있는데 정작 고향에 사는 조카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이처럼 최 여사는 고향인 산청, 외가가 있던 하동, 시댁이 있는 고성 등의 양로원과 불우시설들을 둘러보며 기부하기를 즐겨한다. 올해만 벌써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가종마을을 찾아 복지관 건립비 1억원과 각 마을 경로당의 TV, 시계 등의 비품 구입비를 전달했다. 또 8월 달에는 진주시를 방문해 이창희 진주시장을 만나 좋은 세상 성금 1000만원을 기탁했다. 또 성프란체스코 양로원에 2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최 여사는 이처럼 어려운 이웃만 보면 저절로 지갑에 손이 간다. 성프란치스코 양로원에서도 노인들을 일일이 손을 잡으며 가져간 돈을 나눠줬다. 큰 돈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 1926년 일본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서 태어나 3살 때 아버지 여의어 

이처럼 매년 수억원의 기부를 행하고 어려운 이웃만 보면 저절로 지갑에 손이 가는 최복순 여사(일본이름 스즈끼 마츠코)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최 여사는 1926년 일본 후쿠오카현 이즈카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 출신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와 있었다. 그러나 최 여사가 3살 때 칠남매를 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칠남매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자 어머니는 최여사가 11살 때 “어차피 죽을 바에야 조선으로 가자”며 친척들이 살고 있는 아버지의 고향 산청군 단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에서도 여유가 없는 생활에 어머니와 칠남매를 거두어 줄 친척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11살 때 어머니와 걸어서 부산까지 와서 방직공장에서 일했다. 그래도 가난이 떠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2년을 부산에서 살다가 다시 일본 이즈카로 돌아왔다. 최복순 여사 나이 14세 때의 일이다. 

▶ 14살 때 탄광광부로 일하기 시작해 집안 살림 떠 맡아

이즈카에 와서는 탄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배우지 못한 한국인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탄광에서 매일 새까맣게 되도록 채탄과 운반을 거듭하다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리는 생활이 4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적령기를 맞이하여 혼담도 많았다. 그러자 최 여사는 자기가 어릴 때부터 고생한 탓에 아이가 태어나면 고생시키지 않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은 못 배웠지만 남편만은 대학을 나온 훌륭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 결과 대학을 나온 동포 청년과 결혼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대학을 나와도 한국인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일보다는 도락을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최복순 여사는 시아버지와 시삼촌을 모시고 살았으나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한량이라 가족 전원의 생계는 그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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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하동, 진주, 고성에 양로원 건립 불우이웃 돕는데 발 벗고 나서
10년간 재일동포 모국방문, 원폭 피폭자 일본에 초청해 치료받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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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하려해도 가진 게 없기에 밖에 나가 노동일을 했다. 그렇게 하여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그것을 자본금으로 하여 돼지를 키워가며 행상을 했다. 그러자 장녀가 태어나고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초등학교도 가보지 못한 자신이 구태여 대학출신의 남편을 만난 잘못이었다고 체념을 하고 최 여사는 오로지 밤낮없이 일을 했다. 돈을 모으는 방법은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생활비와 학비 외에는 절대로 돈을 쓰지 않았다.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장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재일동포의 숙명이었다. 토지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땅 값이 오를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적중해 땅은 그녀에게 많은 부를 안겨주었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파친코 사업에도 진출했다. 이 사업은 지금까지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사업이다. 이렇게 해서 돈이 모이자 최 여사는 불우한 이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파친코 사업 통해 돈을 벌어 불우한 이웃 돌보기 시작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옛일이 생각나면 택시를 잡아타고 상점가에 가서 의복을 닥치는 대로 사서 고아원이나 장애인 시설, 양로원 등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냈다. 일본 적십자사에도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데 어느 해인가 거액을 적십자사에 가져가서 기부를 하니 “누구십니까”라고 물어서 “이름은 잊었다”고 대답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그만큼 최 여사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기부를 한다.
오무라 시립고아원. 이곳도 최복순 여사의 손길이 닿는 곳이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바라는 길을 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기부를 하고 있다. 최 여사가 고아원에 기부한 동상에는 ‘날개를 달아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 부모 없는 성장이 절대로 성장을 막지 않기를 바라는 최 여사의 생각이다. 최 여사는 힘차게 날개를 펼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불안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사회가 얼마나 따뜻하게 보살피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가 정해진다고 최 여사는 생각하고 고아원에 기부를 한다. 이 고아원 도서실에는 ‘스즈키 문고’가 설치되어 있다. 최 여사가 기부한 책으로 문고를 만든 것이다. 각 학년별로 오락서적을 비롯해 학술서적, 교양서적까지 갖추고 있다. 최 여사는 일본의 고아원 뿐 아니라 한국의 고아원에도 익명으로 기부를 하고 있다.

▶ 오무라 시립 고아원에 “날개를 달아라” 동상 기증

그녀가 가장 역점을 들여 시작한 사업은 재일동포 모국방문이었다. 조국에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 여사가 전액 비용을 들여 모국방문을 주선했다. 지난 1986년 오무라 시에 거주하고 있는 불우한 동포노인 30명을 자신이 여행경비와 용돈을 들여 고국여행을 시켜준 것을 시작으로 10년간 이 일을 진행했다. 최 여사의 도움으로 고국방문을 한 재일동포는 모두 400명이 넘는다. 한번은 생활보호자들을 데려가려 했을 때 시에서 생활보조비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도항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오고 싶어서 일본으로 온 것도 아닌 사람들인데… 사람으로서 정은 없느냐”하며 시청과 담판을 해 데리고 오기도 했다.
최복순 여사가 하는 일 가운데 또 하나의 일은 원폭 피폭자들을 돕는 일이다.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 치료도 받지 못하는 피폭자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치료받게 하기도 했다. 글/김영우·사진/이용규기자

▲ 최복순 여사가 자신의 공덕을 기리며 산청군민들이 단성면에 건립한 헌성비를 가리키고 있다.
최복순 여사가 조국에 한 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로당 건립사업

▲1982년 산청군 단성면 오암 경로당 건립비 250만원을 지원 ▲1995년 산청군 단성면 강로 경로당 건립비 4650만원 지원 ▲1996년 고성군 영현면 연화리 경로당 건립비 6300만원 지원 ▲2014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복지관 건립비 1억원 지원

◇독립유공자 기념탑 등 조형물 건립

▲1979년 산청군 단성면 운리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비 130만원 지원 ▲1981년 산청군 단성면 사무소 정문 건립비 100만원 지원 ▲1982년 신창근 딘상만 입석초등학교 이순신 장군 동상 및 시계탑 건립비 160만원 지원 ▲1987년 진주성지내 종각 건립비 4000만원 지원 ▲1990년 진주 천수교 가설 기금 2000만원 지원 ▲1993년 산청군 단성면 운리 독립유공자 기념탑 건립 2700만원 지원

◇각종 단체 지원

▲1982년 성심원 50만원 지원 ▲1983년 산청군 단성면 영세민 36만원 지원 ▲1984년 산청군 단성면 새마을 사업비 50만원, 성심원 50만원, 영세여성가구주에 200만원 지원 ▲1986년 산청군 장학금 200만원 불우이웃돕기 600만원, 영세여성가구주 생업자금 400만원 지원 ▲1987년 산청군 여성단체 100만원, 단성면사무소 210만원, 산청군 재해의연금 500만원 지원 ▲진주지역 영세여성가구주 위문금 210만원 지원 ▲1988년 평화제 행사에 300만원, 합동결혼식에 100만원 지원 ▲1989년 저소득 모자가정에 500만원 지원 ▲1990년 장학금 100만원, 불우이웃돕기 성금 300만원 ▲1991년 저소득 모자가정 100만원, 여성단체 후원금 100만원 ▲1994년 진주시 불우이웃돕기 성금 500만원, 성프란치스코 양로원 200만원, 저소득 모자가정 위문금 300만원 지원 ▲1995년 사할린 귀국동포 1000만원 지원 ▲1995년 진주시 불우이웃돕기 500만원, 성프란치스코 양로원 300만원 지원 ▲2014년 진주시 8월 세상 1000만원, 6월 200만원 지원 ▲하동군청 엘리베이터 건립비 1억5000만원 지원

◇재일동포 모국방문 지원

▲1986년부터 10년간 비용일체를 부담해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를 이끌고 모국방문 ▲1990년 동포중고생 31명에게 ‘조국바로알기 여행’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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