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편지 봉투
빨간 편지 봉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4.12.22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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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노인회사무국장

며칠 전, 퇴근하여 집에 당도하니 벌써 주위가 어둑어둑하다. 여느 날과 같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문 옆에 매달린 우편함으로 가서 우편물을 끄집어냈다. 어둑한 날씨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둘둘 말은 긴 달력 하나가 우편함 아가리를 바치고 있고, 그 안에 누군가가 보낸 청첩장과 책 한 권, 그리고 빨간 봉투 하나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얼핏 본 빨간 봉투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게 했다.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빨간 봉투는 보통 과태료 통지나 어떤 경고 서한 등을 보낼 때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또 빨간 색깔은 정열적인 열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문간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잠깐의 시간이지만 이게 뭘까? 궁금했다. 이 나이에 내 마음을 설레게 할 연서(戀書)가 올 리도 없고 분명히 좋지 않은 편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불을 켜고 그 봉투부터 보았다. 뜻밖에도 경산에 사는 어린 손자 놈들이 보낸 카드였다. 봉투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주소와 이름을 보니 금방 토끼 같은 손자 놈들의 얼굴이 떠올라 단숨에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아홉 살로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큰 손자와 일곱 살로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손자가 만든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 두 놈 다 삐뚤빼뚤 쓴 글씨나 내용은 비슷하지만, 그래도 그 서툰 글씨에 순진 무궁한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큰놈은 초등학생이라, 그만해도 조금은 형식을 갖춘 글 같아서 정감이 약간 덜하였고, 작은놈이 제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로 쓴 글이 더 정감이 갔다.

“할아버지 시골 무서운 데서 잘 지내셔요? 저는 잘 지내요. 밥도 잘 먹고 유치원도 잘 다니고 엄마 아빠 말씀도 잘 듣고, 형아랑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할아버지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마을 변두리 야산자락에 있어 올 때마다 어린 마음에 조금은 무서웠던 모양이다. 정말 옆에 있으면 꼭 껴안고 깨물어주고 싶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두 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저녁 식사할 생각도 잠시 잊은 채, 바로 귀여운 손자 놈들에게 반가운 내 마음을 전하려고 전화를 했더니 가족끼리 어딜 나갔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성급한 마음에 며느리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연말이라 바빠서 아직 퇴근을 못했다며, 애들은 인근에 사는 외할머니 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며, 퇴근하는 대로 애들에게 전화를 내게 하겠다고 했다. 손자 놈들의 반가운 카드에, 며느리의 밝고 친근한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저녁식사 후, TV를 보며 쉬고 있는데 손자 놈의 전화가 왔다. 두 놈이 교대로 바꿔가며 카드를 만들어 보낸 자랑을 한다. 큰놈은 얼마 전 시험에서 모두 백점을 받았다며 자랑을 하고, 작은놈은 형을 따라 카드를 만든 얘기며, 좋아는 여자 친구도 있다는 둥 두서없이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반가웠다.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맞장구를 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두 놈을 볼 때마다 역시 자녀는 둘 이상이 낳아 키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한다. 형제자매가 있으면 가끔 저들끼리 싸움질도 하겠지만, 서로 돕고 사는 협동심과 이해심, 그리고 선의의 경쟁심과 포용력을 가지게 되어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데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요즈음 젊은 부부 대다수가 자녀 교육 문제를 내세우며, 한 자녀만 가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다 보니 혼자 크는 자녀들이 북한에서 흔히 쓰는 말로 자기가 ‘최고의 존엄인양’ 이기심만 가득한 사람으로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가 자꾸 각박하고 살벌해져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아들만 셋이다. 큰아들 내외는 부산에서 살고 있고, 둘째 내외는 대구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셋째는 서른을 훌쩍 넘은 나인데도 아직 미혼으로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런데 큰아들은 결혼을 좀 늦게 하여 딸린 손자가 아직 어려서 전화로 가끔 재롱을 떨지만, 편지를 쓰지는 못하고, 대구에 사는 둘째 아들에 딸린 손자 놈들이 직접 연말 카드를 만들어 보낸 것이다.

나는 평소 나를 닮아 마음의 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아들만 있고, 잔정이 많은 딸이 없어 아쉬워하든 터라, 며느리 둘을 모두 딸 같이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며느리들도 모두 착해서 나에게 잘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친 여식 같이 만만치는 않은 게 사실이다. 그 틈새를 손자 놈들이 때워 주는 것 같다. 객지에 있는 손자들과는 일 년에 몇 번밖에 만나지 못한다. 그런대도 만날 때마다 할아버지 소리를 입에 달고 있고, 교대로 무릎에 안겨 더는 것이 너무 귀여워, ‘아! 이런 게 핏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무한한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자식들이 성장하고 사회인으로 바삐 살면서 인륜의 정이 차츰 멀어지는 같아 아쉬움을 가져왔는데, 그 부족한 정을 손자 놈들이 보충해 주는 것 같다. 이날의 빨간 편지 봉투에도 그놈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티 없이 맑고 순진한 정을 담뿍 담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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