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리(伊萬里)에 내리는 비
이마리(伊萬里)에 내리는 비
  • 한송학기자
  • 승인 2014.12.30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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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순/경남문인협회, 경남수필문학회 회원

큐슈 사가현 사가시의 서쪽으로 50Km, 후쿠오카에서 기차로 이마리(伊萬里)역에 내려 다시 버스로 20여분이면 한적한 시골 오오카와치야마 마을이 있다. 10월이라 차창너머로 스치는 마을마다 붉은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들녘에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간다. 시골로 들어갈수록 낡은 목재가옥들과 담장안의 감나무와 석류나무들이 우리의 산골 풍경처럼 정겹다.

이 지역 아리타와 이마리는 도자기 마을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마다 도자기 장식이 많이 있다. 상점마다 청화백자 혹은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들이 오는 길손을 맞이한다. 아리타는 조선도공이었던 이삼평이 일본 최초로 백자를 만든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마리의 오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는 산세가 험하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갑자기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고즈넉한 마을 왼쪽 산비탈에 무연고 공동묘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잡목들이 흔들리는 사이로 묘지의 비석들이 일제히 얼굴을 내밀고 쳐다본다. 800여 기가 넘는 중에 고려인 무연고 묘지는 500여 기가 넘는다고 한다. 무연고 묘지라면 그들의 후손이 없이 일생을 마감한 우리 조선인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조선의 도공들이 수백 명 끌려와서 정착한 우리의 선조들이기에 더욱 마음 아프다. 수백 년 시간이 멎은 듯 이 외딴 묘지는 거칠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저 묘지의 사람들이 흩뿌리는 찬비 속에 기쁜 듯 슬픈 듯 어서 와서 한 많은 영혼 위로해 달라 한다. 과일과 포로 술 한 잔 올리지 못함이 죄스럽다. 묵념하듯 고개 숙여 그들을 조상한다.
오직 우리 산야의 흙으로 사발을 빚던 흰옷 입은 장이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배에 실려 현해탄을 건너 왔던 그들, 깊은 산중 산으로 막히고 군졸들이 길을 막아 꼼짝없이 갇혀 도자기만을 빚으며 살았던 그들이다. 당시 조선의 사발은 일본에서는 이도다완으로 최상으로 꼽지 않았는가.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낯선 곳에서 흙을 캐고 마을 옆을 흐르는 강에서 물을 길러 차 사발을 만들고 빨래를 했을 것이다. 저 강은 그 옛날 이들의 눈물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고 있다. 낯설고 물 설은 이곳에서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얼마나 그립고 외로웠을 것인가. 밤마다 눈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오다 그치다 하는 찬비는 그들의 눈물인양 슬프다.
산 아래 옛 가옥 그대로 간직한 마을을 둘러본다. 거리와 상점들이 한적하다. 가끔 일본인 관광객이 골목을 돌아 나가고 나면 금세 조용하다. 나지막한 지붕과 굴뚝과 도자기 굽는 시설도 소박하다. 지금도 우리 후손들이 시대 따라 변천한 아름다운 자기들을 만들고 굽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다. 나는 비교적 싼 그릇 두어 점과 그림엽서 몇 장을 샀다.
그만 마을을 내려가려는데 문이 굳게 잠겨있는 가게 유리문 안에는 청자화병과 그릇들, 불상이 내 눈을 끌었다. 그 많던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가 아니라 그저 우리의 고려청자를 닮은 비색이 반갑다. 비록 운학이 너울대는 그림은 없어도 분명히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청자들이다. 그들의 후손이 있기에 저토록 고스란히 전해 오는구나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가 눈여겨본다. 조선 도공의 손길이 묻은 듯 수수한 청자들이 내게 이토록 반가운 것은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옛 전통이 아니던가.
다시 빗발이 세차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비에 젖는 마을을 바라본다. 아직 가을단풍이 들지 않은 산이 검푸르게 젖어있다. 그리고 저 건너 산비탈 조선 도공들의 무연고 묘지들도 돌아본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시린 마음, 잊혀 지지 않는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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