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
청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2.0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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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노인회사무국장
 

청렴(淸廉)‘청렴’이란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고결하고 재물 욕심이 없음을 말한다. ‘청렴’은 바른 사회 구현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로, 특히 공직자들에게 강조되고 있다. 각종 언론을 통해 매일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부정사건 얘기를 들으면, 마치 나라 구석구석이 다 썩은 것처럼 걱정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사건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기적이고 끝없는 욕망을 가진 인간사회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부정사건에는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 갈취하는 부정도 있지만, 부정과 인정의 한계가 애매 한데서 발생하는 때도 있다. 요즘 티브이에서 홍보하듯, 인정으로 주고받는 선물이 뇌물로 비칠 수도 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우리 합천군도 예전에는 헛소문인지 모르지만, 인사 때나 각종 사업에 따른 좋지 않은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의 하창환 군수가 취임한 후 이러한 소문이 사라져 지역 공직사회가 아주 깨끗해진 것 같았는데, 며칠 전 한 군청 공무원이 사업에 따른 뇌물성 돈을 받아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여 옥에 티로 아쉬움을 갖게 한다.

나는 부정에 관한 얘기를 들을 때면, 가끔 내가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일어났던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는다. 1974년 1월, 고향인 이곳 합천면(지금은 읍)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새마을사업이 한창 시행되었고, 소규모 주민숙원사업은 거의 마을 도급 형식으로 시행되었다.나는 토목직 공무원으로 관내 사업장을 순회하며 설계와 공사지도 하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지역 내 국도나 마을 길이 모두 비포장도로였다.

면 직원들이 관내 출장을 다닐 때는 먼 길을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로 다녀야 했고, 면사무소마다 겨우 면장이 출장에 이용할 수 있는 오토바이 한 대씩이 배정되어 있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면장님의 허락을 받아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관내 마을에서 시공하고 있는 사업장을 둘러보기 위해 출장을 갔다. 어느 제법 큰 마을 앞 도랑에 10미터 남짓한 소교량 건설공사를 하고 있었다. 일하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업장을 둘러본 후 사무실로 돌아오기 위해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막 출발하는데, 그 마을 유지로 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 내 잠바 주머니에 흰 봉투 하나를 쑤셔 넣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너무 황당하기도 하고, 오토바이가 출발하는 중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겁결에 그대로 돌아왔다. 면사무소에 돌아와서 보니 봉투 속에 5천 원이 들어 있었다. 아마 지금 돈 가치로 보면 한 이삼십 만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공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받은 뇌물성 돈이었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겁이나 계장님과 옆 직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모두 싱긋이 웃기만 했다. 그날 퇴근 시에 그 돈으로 계장님 이하 같은 계 직원들끼리 나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솔직히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공무원들에게 이런 일도 종종 있구나!’ 싶어 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그 후 며칠이 지나 다시 관내 사업장을 둘러보기 위해 출장을 나갔고, 그곳을 들렀다. 현장 책임자란 그 사람은 없고 일하는 사람들만 있었다. 그런데 설계도와 맞춰보니 거푸집 위에 깔아놓은 철근이 굵기도 맞지 않고 개수도 모자랐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모두 새로 시공하라고 지시를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이었다. 첫 출장 때 나에게 돈 봉투를 넣어준 그 사람이 내려와 나를 면사무소 뒤편으로 불러냈다. 나갔더니 다짜고짜 “너 이 자식 죽을래?” 하며 위협을 했다. 며칠 전에 넣어 준 돈, 즉 뇌물 먹은 대가로 톡톡히 망신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 선친 함자까지 팔려가며 위협을 했다. 공무를 집행하면서 당당해야 할 내가 몇 푼의 돈을 받고 오히려 사정하는 꼴이 되었다. 지난 일로 매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결과는 철근 몇 가닥 더 넣는 것으로 타협하고 끝을 맺었다.그 일은 내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큰 교훈이 되었다. 안 그래도 소심한 성격인데다가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공직생활을 마칠 때까지 매사에 돌다리도 뚜드려보고 걷는 심정으로 했다. 때로는 상사들로부터 “간이 그렇게 작아서 뭐 하겠느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였고, 내가 더 승진을 못 한 이유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덕분에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그 후로 물을 씻어먹듯이 깨끗하게 공직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양심선언을 하자면,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때로는 밥 대접도 받았고, 소액의 촌지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 평소 지인들과 인정을 나누는 정도여서 지금도 양심에 큰 부끄러움을 갖지는 않았다.며칠 전, 공직에 있는 아들 며느리 넷을 모아 놓고, 부끄러운 그때의 얘기를 해 주면서 내가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지겹게 들었던 ‘청렴’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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