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절과 태극기, 그리고 애국가
3ㆍ1절과 태극기, 그리고 애국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3.01 18: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영주/국학원 상임고문ㆍ한민족 역사문화공원 공원장

최근 영화 ‘국제시장’이 연일 관객 수를 갱신하며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중에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국기가 하강하자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이 있다. 웃다가도 가슴이 뭉클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두고 ‘기억나는 부분’으로 거론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일상사이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을 받았는지 일각에서 태극기 게양을 법제화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에 대하여 강제성을 띄면 안 되고 국기에 대한 교육으로 강화시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이런 국민교육이 왜 이어져 오지 않았을까?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사람들이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당당하게도 하지 않는 사태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국경일에 그 많은 아파트 창가에는 과연 몇 가구나 국기가 걸리고 있는가? 미국은 365일 성조기를 게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왜 국기를 소홀히 하는가? 교육한다면 과연 국경일 마다 월드컵 때처럼 온통 거리를 물들이는 태극기 물결의 장관을 뜨거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광복 70년의 3.1절을 맞아 태극기에 대한 의미와 국민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다시 살펴 볼 일이다. 1919년 3월 1일, 세계사의 변방 아시아의 ‘빼앗긴 나라 조선’에서 세계역사상 가장 거대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은 그 기운이 무르익다가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국내외에서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3월 3일로 예정된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2일 앞두고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중심에는 태극기가 있었다. 태극기의 원형은 고종황제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근세조선의 제26대 고종황제는 왜,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고종황제는 아들의 국혼을 4일 앞두고 1919년 1월21일 이른 아침,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말한 것을 기록한 윤치호의 일기는 독살설을 의심케 한다. 67세로 아직 건강하던 고종은 자정이 좀 지난 시간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 갔다. 시신은 이가 다 빠져 있고, 혀는 심하게 상했으며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시신의 팔다리는 부어올라 수의로 갈아입히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 의심을 더하는 사실은 몇 달 전, 고종이 모르는 사이에 어의御醫가 경질되었고, 사건 당일 고종이 계신 덕수궁에서 숙직한 인물들은 이완용, 이기용 등 친일파들이었다. 사건 당일 고종의 수라를 맡은 궁녀 2명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차례로 죽어갔다.
 

이처럼 참혹한 식민지하에서 기어이 생명의 빛을 회복하려는 한민족의 광복의 뜻에 따라 한반도는 온통 태극기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태극기를 볼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 놓았던 마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꺼지지 않는 태극의 물결은 마침내 상해임시정부 발족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도 이에 자극 받아 중국대륙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촉발되었다. 이 자존의 뜻과 기운은 베트남으로, 인도로, 멀리 아프리카의 이집트로 자주독립의 인권운동이 되어 밀물처럼 번져 갔다.

당시 세계 인구의 2/3가 제국주의의 폭압하에 신음하던 세계사에 당당하게 고개 쳐든 조선발 ‘인권과 생명의 존엄의 빛을 찾기 위한 절규와 저항’이었다. 이 세기적인 인성회복운동의 중심에는 엄연히 우리의 태극기정신이 있었다. 3.1절을 보내면서 이제 그 태극기에 대한 고결한 배움과 기림이 자발적인 전 국민적 정신운동으로 전개 되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