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 혁명과 4·19 학생 혁명
재스민 혁명과 4·19 학생 혁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06.0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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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치사 길이 남을 아름다운 혁명

▲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80)은 뉴시스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 '산고곡심'에서 4·19 민주학생 혁명은 세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혁명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김 전 부위원장이 1959년 육군 참모총장실 수석전속부관 때의 모습이다.
지난 번 칼럼에서 '국격(國格)'을 논하면서 이집트의 한 재스민 혁명 지도자가 일본을 부러워한다고 말한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한국도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사실 한국이 전 세계에, 특히 재스민 혁명이 한창인 중동국가들에 '일본도 하지 못한 위대한 일'이라며 내세울 것이 하나 있다.

지금처럼 한국이 경제발전, 정치 민주화 등을 달성하기 한참 전인, 무려 51년 전 '지지리도 못 사는 코리아'에서 나온 기적 같은 일이다. 바로 4·19 민주학생 혁명이다. 비록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세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혁명임에 틀림없다.

먼저 4·19 당시 상황을 짚어보자. 다들 아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계엄사령관 수석부관으로 4·19를 한 가운데에서 치렀다. 얼마 남지 않은 역사의 증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꼭 되짚어보고 싶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상의 단일후보로 당선이 확정적인 가운데(민주당 조병옥 박사 사망 때문) 여당인 자유당이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무리하게 당선시키기 위해 꾸며낸 철저한 부정선거였다. 당시 장면 박사(민주당)가 부통령이었고, 1956년 선거에 이어 다시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와 맞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는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을 계기로 들불처럼 번졌다. 서울에서도 4월18일 고려대 시위대가 종로4가에서 깡패들의 곡괭이 습격을 받자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닫기 시작했다. 4월19일에는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하자고 몰려간 시위대에게 경찰이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당시 경찰은 페퍼포그(Pepper fog) 같은 시위진압장비는 없었고, 칼빈총만 들고 있었다. 시위대는 마침 중앙청 앞에 보행로 포장을 위해 쌓아 놓은 블록을 깨서 대항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4월19일 오후 1시께 경무대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불러들였다. 당시 필자는 송 총장의 수석부관이었다. 연희대학 정치외교과 2학년 때 고등고시 원서를 내고 고시를 준비하다가 한국전쟁이 나는 바람에 부산육군보병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고, 계속 군문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필자 밑으로 육사 11기 수석 졸업생인 김성진 대위가 내근부관, 12기 수석 졸업생인 이병간 대위는 수행부관을 맡고 있었다.

경무대의 발포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이에 오전 11시로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는데 송 총장의 반대로 오후 3시로 비상계엄이 다소 늦게 선포됐다. 내각은 총사퇴해 중앙청에 집거했고, 모든 것은 송 총장에게 넘어왔다. 자유당은 육군이 강제진압이든 뭐든, 수습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송 총장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수습을 빨리 하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실제로 자유당은 얼토당토 않게 송 총장도 당무회의에 출석하도록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통화에서 이 자유당의 고위인사는 "(송 총장의)모가지를 처버리겠어! X자식"이라고 욕까지 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필자는 어린 마음(당시 29세)에 걱정이 돼 송요찬 계엄사령관에게 급히 보고를 했는데, 그는 "내버려둬"라고 일축했다.

송 총장은 양평에 있는 보병 15사단(사단장 조재미 준장)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15사단은 밤늦게 서울에 진입, 경북궁에 주둔하며 시위를 진압하고, 서울 시내를 장악했다. 이어 4월20일 아침에는 고려대에 모여 있는 1900명의 학생을 해산시켰다.

이 대목에서 굳건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송요찬 장군의 결단이 아주 중요했다. 재스민혁명을 맞고 있는 작금의 중동국가, 그중에서도 군부가 귀 담아 들어야 하는 장면이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중요한 훈령을 내렸다.

'학생은 폭도가 아니다. 방화범을 빼고는 전부 석방한다. 군은 시위대에 절대로 발포해서는 안 된다. 또 국가원수는 반드시 보호한다. 수습은 하되 나머지 일은 정부와 정치권에 맡긴다.'

51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봐도 위기 상황의 국가에서 참군인이 지켜야할 최고의 방침이다. 송 총장은 칼빈총탄 10만 발을 빌려달라는 치안당국의 요청도 거절했다. 당연히 자유당의 불만도 대단했다. 그러나 송 총장의 지휘하에 치안은 확보되고 수습에 가닥이 잡혀갔다. 정치권도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임하고, 부정선거 책임자는 처벌하고, 선거는 다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수습이 되고 보니 마음이 바뀐 자유당의 농간으로 장면 부통령이 먼저 사임을 발표하고, 전방부대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이기붕 당선자의 '사퇴 고려' 성명이 발표되자 전국은 다시 수습 불가능 상태가 됐다.

태평로에서는 교수데모가 열렸고, 군이 국민편임을 안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갔다. 그쯤이었다. 국회 연락장교 신원식 대령의 긴급보고를 받은 필자가 계엄사령관실에 들어가니 총장은 휴식 중이었다. 겉보기에 참 태평도 했다. 확실한 원칙이 서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바로 깨워 "큰일 났습니다"고 보고를 하니 송 사령관은 참모차장(김종오 중장)에게 말하라고 지시한 후 도로 자 버렸다. 일부러 시위를 강경 진압하지 않은 것이다. 그날 밤 서울 시내는 나라가 뒤집히듯 시끄러웠고 26일 아침 이 대통령에게 송요찬 총장이 건의하려고 올라갔다.

송 총장은 이 대통령에게 "발포하기 전에는 수습이 안 된다"는 보고를 했고, 이 대통령은 "발포는 안 돼”하고는 "국민이 무얼 원하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송 총장은 "하야하시랍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곧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그렇게 해서 평화로운 학생혁명이 일주일 만에 성공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곧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얼마 후 하와이로 떠났다. 학생들은 질서유지에 앞장섰고, 거리를 청소했다. 멋진 군인, 멋진 용퇴(대통령), 멋진 학생들이었다. 외신은 '위대한 승리', '특별한 혁명'이라고 칭송했다.

당시 군은 북한의 남침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보호하고, 그러면서도 국민 편에 서서 발포를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국민의 의사에, 또 정치는 정치에 맡기는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부정선거 책임자와 발포명령자 처리도 과도정부에 맡겼다. 또 군이 임시정부를 맡아 수습해달라는 정치적 유혹과 기회도 있었지만 군 본연의 책무를 지켰다.

당시 군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국제적인 엘리트였고, 한국전쟁이 끝난 지 6년여밖에 안 되었던 때였다. 소위 춥고, 배고픈 시대였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좀 장황한 것 같지만 후세가, 그리고 아직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다른 나라들이 꼭 알아야 생생한 역사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근래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수 차례 필자를 찾아와 4·19 당시 군의 움직임과 군에서 본 4·19에 대해 물었다. 또 4·19 관계 서적의 출판을 위한 집필자들과 인터뷰도 했고, 함세영 신부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이들에게도 위와 같은 얘기를 했다.

현재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이 중동 전역으로 번지고 있다. 40년 권좌에 있던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를 밀어냈고, 예멘, 바레인, 시리아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카다피가 40년을 통치해 온 리비아는 내전으로 번지고, 급기야 서방연합국이 개입하고 있다. 모두 근 천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2차대전 후 40년 동안 독제정치에 시달린 끝에 이제 압제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주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51년 전 한국의 학생혁명을 참고했으면 한다. 불의에 대한 국민적 항거, 군인다운 군인, 대통령의 용단 등 아름다운 혁명의 교과서로 4·19는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었기에 비록 아픔은 있었지만 최빈국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소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는 "서울올림픽이 동구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돼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1988년이니 이것은 23년 전 얘기다. 한국이 냉전시대를 무너뜨린 동유럽 민주화의 촉진제가 됐다. 내 스스로 말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이렇게 말해주니 한국이 경제뿐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마치 착각과도 같은 뿌뜻함이 들었다.

특별히 올해 4월19일에는 많은 국민들(이제는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이 대한민국의 국격과 관련해 큰 자부심을 느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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