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같은 포근한 봄의 정취 그대로 간직한 곳
고향 같은 포근한 봄의 정취 그대로 간직한 곳
  • 산청/정도정기자
  • 승인 2015.03.3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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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오부면의 숨겨진 관광명소

▲ 지리산 천왕봉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청군 오부면.

꺾이지 않을 것 같던 매서운 추위도 물러서고 코끝으로 봄바람이 상큼하게 느껴지는 계절이 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복잡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고향과 같은 포근한 봄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다.

바로 지리산 천왕봉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청군 오부면이다.

오부면은 원래 오곡면과 부곡면의 3개의 면이었으나 1914년에 오부면으로 통합되었다.

두 지역이 합하여 이루어진 면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면적이지만 지형적으로는 사이에 산이 가로막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재를 너머서 두 곳이 연결되는데 그 재의 이름이 선들재이다. 그 이름에 알맞게 토산인데도 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선들재를 경계로 하여서 보면 바깥쪽(서쪽)이 옛 오곡지역이고 안쪽(동쪽)이 부곡지역이다. 선들재에서 부곡으로 가자면 지가대골이 있는데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 열 두 모퉁이다.

옛날 임진왜란 시에 왜병이 쳐들어오다가 모퉁이를 열한 번 돌아도 마을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라고 하여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부곡은 그 지형이 가마솥 같이 생겼다고 하여 오래 전부터 지어진 이름인데 지가대골 열 두 모퉁이를 돌아서 보면 툭 트인 분지가 둥그렇게 펼쳐진 살기 좋은 고장이다.

안쪽에 위치한 오휴마을은 옛날에 오촌 홍성해라는 분이 이곳에 오자 까마귀가 울면서 길을 인도하므로 따라가서 잡은 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여기에 살면서 오휴, 즉 까마귀가 쉬었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서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취재기자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으로 봄 소풍을 떠나보자.

-소룡산과 바랑산으로 봄 산행은 더할나위 없다.

▲소룡산과 바랑산은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의 오지에 위치한 왕촌, 신촌, 오휴마을 등을 에워싸고 있다.

바랑산은 북쪽 방향의 왕촌과 신촌마을의 뒷산이고 소룡산은 남쪽방향의 오휴마을 뒷산이다.

이 산은 서로 능선을 같이 하고 있으며 거창군 신원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소룡산 기슭의 동굴과 능선 너머의 천길 절벽인 새이덤, 그리고 소룡산 정상부근의 전망이 좋은 암릉길 등을 비롯하여 자연스러운 숲과 암릉이 잘 어울려있어 산행지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바랑산과 소룡산의 글자지명 “바랑”은 새의 둥지를 뜻하고, 소룡산의 “소”자도 둥지 또는 집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산의 이름대로 본다면 바랑산은 모든 새의 둥지이고, 소룡산은 용의 둥지를 뜻하므로 새와 용의 보금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바랑산은 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넘은 산이라하여 바랑산이라는 말도 있다.

오휴마을 뒷산에는 옛날에 홍씨가 피난했던 굴이라 하여 홍굴로 불리는 동굴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금서면 신풍에서 홍씨 중조이신 오촌 선생께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을 등에 업고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고 오촌선생 문집 서문에 소개되어 있다.

다시 되돌아와서 소룡산 정상을 향해 조금 오르면 강굴이 있다.

강씨들이 이 굴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하여 강굴이라고 하는데 깊이가 15m가량 되어 그 안에 30명이 들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넓다.

강굴의 유래를 살펴보자면 약 500년전 임진왜란 당시 진양에서 강 언연공이 부모님을 모시고 소룡산으로 들어와 산아래 석굴을 발굴하여 석실 내에서 은거생활을 했다고 한다.

석굴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산둘레에 성을 쌓아 수호하고 수년간 생활하다가 난이 끝난 후 석벽에 진양강씨세수라고 여섯 자를 새겨놓고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강굴에서 다시 등산로로 되돌아와서 정상을 향해 조금 오르면 소룡산 정상의 표지석이 있다.

이 산에서는 웅석봉을 비롯한 지리산 줄기가 멀리 조망된다.

정상에서 바랑산 방향을 5분정도 가면 묘지가 있고, 아래쪽에 새이덤이라 불리는 절벽이 있다.

이 절벽의 꼭대기에는 아래로 여러 곳을 전망하기가 좋다. 새이덤 봉우리에서 가파르게 20분정도 내려서면 큰목재(안부)이다.

큰목재에는 오휴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뚜렷하게 있다. 그리고 바랑산까지는 1.7km를 표시하고 있다. 새이덤에 내려서면 소나무숲이 바랑산까지 계속된다.

산행은 신촌마을 노인정에서 시작, 진양기맥~절재~바랑산~큰재~새이덤~소룡산~망바위로 이어져 오휴마을에서 맺는다. 전체 산행거리는 10.7㎞. 5시간이면 넉넉하다.

-임진왜란 소년 포로 홍호연 420년만에 귀환하다.

▲12살에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간 홍호연을 아는가?.

1593년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여 군관민이 학살된 후 그 여파로 인근 고을 산청에 까지 왜군이 들이닥쳤다.

홍호연(洪浩然, 1582-1657)은 진주성을 점령한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이때 그는 12살 어린 소년이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홍호연은 번주의 도움으로 사무라이 교육과 유학 교육을 받았지만, 그들이 요청한 일본식 이름은 끝내 거부하고 홍씨의 성을 계속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후 나오시게의 아들인 가쓰시게(鍋島勝茂, 사가번의 번주)의 측근으로 일하면서 능숙한 한시(漢詩)와 독특한 혹부리체 서예로 이름을 떨쳤다.

글자의 처음과 마지막을 뭉퉁하게 쓴 그의 혹부리체 글씨는 일본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여 사찰이나 신사의 현판으로 많이 쓰여졌다.

70세 때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 허가되었으나 번주의 변심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홍호연은 지금까지 자신이 받던 녹봉을 반으로 감할 것과 그것을 후손에게 세습해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 냈다.

이 무렵 그가 쓴 두보 시의 한 구절, 즉 ‘편주의불망(扁舟意不忘 : 조각배 타고 놀던 생각을 잊지 못한다)’은 고향을 그리는 그의 간절한 염원을 알게 한다.

1657년 3월 번주 가쓰시게가 사망하자 홍호연은 당시 일본의 관행인 가신을 따라 죽는 예에 따라 76세의 나이로 할복 순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에서 그 후손들이 뿌리를 내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의 헌신적 배려였다.

죽음에 임하여 홍호연은 마지막으로 ‘인(忍)’이라는 한 글자를 써서 후손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거기에는 ‘인즉심지보 불인신지앙(忍則心之寶 不忍身之殃 : 참는 것은 마음의 보배요 참지 못하는 것은 육신의 재앙)’이라는 글이 덧붙여졌다.

그의 1차 염원(귀향)은 당대에 이루지 못했으나, 2차 염원(자손의 안녕)은 계속 이어져 홍호연의 후손들은 성을 바꾸지 않고 ‘코오’라는 홍씨(洪氏) 성을 400백년 이상 지켜왔다.

지난 2008년 후손인 코오 요시로(洪悅郞)는 가전되어 오던 홍호연과 그 후손들의 유품들을 사가현 나고야성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 후 2010년 홍호연의 자료들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을 테마로 전시되면서 유물을 따라 그의 염원도 귀환하였다.

국립진주박물관과 일본 나고야성박물관은 공동학술조사 결과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의 남양홍씨 집성촌과 족보인‘남양홍씨세보’를 통해 홍호연의 이름이‘운해’임을 확인하고 후손을 추척했다.

현재 중촌리에는 홍호연의 형제 홍성해(洪成海)·홍진해(洪進海)의 후손 5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음이 밝혀졌고, 한일 간에 떨어져 있던 두 집안은 420년만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되었다.

▲ 용산서당.
-용산서당

▲용산서당은 1800년대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오촌 홍성해, 둔암 홍대해, 우봉 홍기범 등 삼현이 은거하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에 세운 서당이다.

이 중 오촌 홍성해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고을을 사수한 공이 있다.

본래는 '용산재'라는 재실이었지만 뒤에 서당으로 바꿨다. 이 서당은 1800년대의 건축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서 가치가 있다.

건물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조체의 중요 부재들은 오래된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외진주, 내진주, 대들보 등 여러 곳에 구멍이 나 있는데 곳곳이 구멍을 메운 형태이다.

가구는 대들보 위 중, 종도리 가구에서 다소 오래된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다. 방 천장은 좌우방 모두 우물반자를 하고 있고, 대청 뒷벽은 판장벽 대신 회벽으로 구성하였다.

용산서당은 2001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4호로 지정되었으며 소재지는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 889번지이다.

▲ 가마실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 조감도.
▲오부 가마실은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마다 4월이 되면 가마실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신작로 길에는 오부의 봄을 알리는 벚꽃나무가 늘어서있다.

오부는 흑돼지, 산채비빔밥, 딸기가 유명하다. 음식은 흑돼지 삽겹살, 김치찌개가 아주 맛있고 푸짐하다.

한적한 시골의 봄을 만끽하고 싶다면 오부를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에 산청군에서는 소룡산 주변에 잠재해 있는 관광자원을 가마실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과 연계 개발하여 관광객 유치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코자 소룡산권 관광자원 개발사업 기본계획 및 타당성연구용역중에 있다.
산청/정도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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