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의 상업(商業)(Ⅰ)
중국(中國)의 상업(商業)(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5.0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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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이번시간에는 중국의 상업(商業)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역사를 통하여 공상업(工商業)을 경시하는 관념이 끊임없었고, 정책적으로 상업의 장려보다는 억제가 많았던 중국인지라 상업이 중국의 경제를 부흥할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상인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유한 신흥계급으로 군림했었다. 억상(抑商)의 정책 밑에서도 중국인 특유의 상술은 신장되어 일찍부터 대외 무역의 길도 텄거니와 비록 융통은 활발하지 못했지만 재화의 축적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주역(周易)》 계사(繫辭)에는 삼대 이전의 신농씨(神農氏) 때부터 시장을 통하여 상품이 교역되었다고 하지만, 기타의 방증자료가 없어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夏)대에는 하우(夏禹)가 즉위한 뒤 이른바 만국(萬國)의 부족들로부터 옥백(玉帛)의 조공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상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은상(殷商)대는 조대 이름부터가 교역의 가능성을 시사했거니와, 《주역》에 이미 화폐의 전신인 조개가 보이고 《시경》에 장사의 매매가 보이는가 하면, 갑골문 복사(卜辭)에도 「패(貝)」자가 많이 보이는 바 상대에 무역행위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함은 무리가 아니다.

주(周)에 이르러 상업의 흔적은 역연하여, 사민(四民) 중에 상업이 그 하나를 차지했으니, 배와 말 따위의 교통 도구의 발달과 화폐의 사용 들이 때를 같이 하여 발전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함께 사유재산의 인정은 생활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만큼, 물물교환에만 의지할 수 없는데다가 토지를 잃은 귀족이 상업으로 전환하자 상업이 융성하였다. 바로 노자(老子)가 말한대로 「온 천하 사람은 이익을 위하여는 부산스럽게 가곤 오곤」하는 가운데 임치(臨淄)나 한단(邯鄲)은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국민생활에 필요한 소금과 쇠[鐵]를 전매(專賣)사업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한된 거부(巨富)인 자공(子貢) ‧ 범여(范蠡) 등은 무역으로, 의돈(猗頓)은 염철(鹽鐵)로 치부하여 그 정치적 세력도 제후에 비길 만했다. 그 중에서도 장사의 조사(祖師)로 불리는 위(魏)나라의 백규(白圭)는 「남이 버릴 때에는 내가 사들이고, 남이 사들일 때는 내가 내놓는다.」의 경상비결(經商秘訣)도 제창한 바 있다.

한대에는 초기 진(秦)나라 때 전쟁의 수난에서 해방된지라 생산에 모든 국민이 힘을 기울이게 되었고 교통이 편리해지자 점차 상업이 번성했다. 비록 온조대를 통하여 억상책을 썼지만, 상업은 오히려 흥성하여 거상(巨商)은 전국을 누비며 교역하여 많은 이윤으로 토지를 매점, 신흥계급을 형성하고, 관리나 농민보다 좋은 생활을 영위했다.

무제(武帝) 때는 상홍양(桑弘羊)이 정부의 재력으로 물가를 조절하기 위하여 각종 공납물(貢納物)을 서울에 모아 비쌀 때에는 방출하고, 쌀 때에는 사들이는 균수평균(均輸平均) 정책을 써서 상인들의 매점(買占)을 막기도 하였다.

또한 무제 때에는 장건(張騫)을 서역(西域)에 파견시켜 국제무역의 길을 개척했고, 주로 생사 ‧ 향료 ‧ 칠 등을 서역을 거쳐 유럽까지 수출했고, 말 ‧ 낙타 ‧ 향료 ‧ 호박(琥珀) ‧ 피리 ‧ 호도 ‧ 포도 ‧ 마늘 등을 수입했다. 이때 교통은 동으로 일본, 서로는 로마, 남으로는 이란 ‧ 인도 등지까지 열렸는데 거의 조공을 위한 통로로 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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