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 현종 아버지 왕욱 부자상봉 스토리
고려왕 현종 아버지 왕욱 부자상봉 스토리
  • 사천/구경회기자
  • 승인 2015.06.1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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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서 정동까지 10km 걸어 '아들을 되돌아본다'

▲ 사천시는 능화마을부터 배방사지를 잇는 길 10km에 고려 현종 부자상봉길을 조성한다.
사천시에 지난 8일 고려 현종과 그의 아버지 욱(郁)과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고려 현종 부자 상봉길’이 조성한다고 밝혔다.

시는 고려 제8대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배방사지(현 정동면)와 사주현((泗水縣·현 사남면)으로 유배되어 살던 그의 아버지 욱(郁)과의 부자 만남을 재조명하고 비운의 고개길인 고자실과 안종능지(욱의 첫묘지), 배방사지를 잇는 역사적 발자취를 스토리텔링 하여 관광 자원화하기로 했다.

시는 2억원을 투입해 능화마을-안종능지-고자실 고개-학촌마을-만마마을-배방사지를 잇는 길이 10km(3시간 소요)에 종합 안내판 등 각종 안내판 7개와 정자와 조경, 돌계단, 표지석 등을 10월까지 조성키로 했다.

지난 992년 7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은 992년(순종11년) 7월 사수현 사남 땅에 귀양을 와 살았다. 당시 욱(郁)은 고려 5대왕 경종의 왕비 황보(皇甫)씨와 정을 통해 아들 순(詢)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은 사남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왕족인 아이는 보모의 손에 키워졌는데 어느날 6대 임금 성종이 아이를 찾아 당시 두살이었던 순(詢)은 성종을 보더니 “아버지”라고 계속해서 부르는 것을 보고 아이가 아버지를 너무도 그리워하는 것이 안타까워 성종은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 땅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도록 하여, 아이는 지금의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뱅잇골에 있는 배방사(排房寺·당시 盧谷寺)에서 거주를 하게 된다.

이에 욱(郁)은 사남면에서 정동면 배방사까지 찾아가 아들 순(詢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는데, 매일같이 사남에서 정동 배방사까지 10km의 거리를 걸어 아들을 만나러 다녔다. 해가 저물면 다시 귀양지로 돌아오면서 아들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천시에서는 올해 아버지 욱이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곳에 고자정(顧子亭)를 세웠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고자봉(顧子峰·아들을 되돌아본다)’이라 하고 이 마을을 ‘고자실(顧子室)’이라 불렀다.
▲ 배방사지 비석


그러나 귀양 온 지 4년만인 996년 욱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아들 순은 사천 땅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 해, 개성(숭교사)로 올라갔다. 그리고 신혈사로 갔다가 마침내 1009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이다.

우리가 잘 아는 천추태후는 제7대 임금인 목종의 친어머니이자 현종에게는 이모가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높이고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고 어머니를 효숙태후로 추존했다.

현종은 어린시절을 보낸 사천 땅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데 당시 진주목에 속해있던 작은 고을이었던 사수현(泗水縣)을 사주현(泗州縣)로 승격시켰다. 그때 전국에는 12개주(州)만 있었으니 가히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이때를 ‘고려사절요’에서는 현종 6년(1015년)이라 기록하고 있으니 벌써 천년 전의 일이다.

또한 당시 사주(泗州)를 왕의 고향이란 뜻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했는데, 역사적으로 풍패지향이라 부르는 곳은 조선시대의 전주(全州)와 고려시대의 사주(泗州) 두 곳 밖에 없다.

사천시에서는 2015년 사주(泗州)로 승격된지 천년을 맞아 고려 8대 임금 현종을 모셨던 배방사(排房寺)의 사지 터와 부자상봉의 애환이 서린 고자실 길을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다.

▲ 비석에는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묘자리에 대한 내력이 담겨있다.
안종능지(安宗陵址)
고려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은 사수현 사남 땅에 귀양을 와 살다가 4년 뒤인 996년 7월에 어린아들 순(詢)을 배방사(排房寺)에 홀로 남기고 이곳에 묻혔다.

욱(郁)은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녘 귀룡동(지금의 사남면 능화마을 뒷산)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伏屍而葬) 하라”고 했다.

풍수지리에 능했던 욱은 이 묘자리가 풍수적으로 보아 임금이 날 자리인데 시체를 엎어서 묻으면 더 빨리 임금이 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자신이 죽은 지 13년인 1009년 아들 순(詢)은 마침내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의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했고 장지가 있는 봉을 능화봉, 그 아래 마을을 능화촌(陵下마을, 陵花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지금의 능화마을은 능이 있는 아래 마을이고 꽃밭 등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이후 능화봉에 있던 시신을 경기도로 옮기면서 여기는 건릉(乾陵)이라 하고 그 터만 남아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작가였던 남재 선생이 읊었다는 한 수의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와룡산이 남쪽 궁벽한 곳에 있으니 왕자가 멀리서 와 이곳에 놀았더라. 옛 무덤 허물어져 풀만이 무성하고 까마귀 슬피울어 석양의 수심을 보내네!’

배방사지(排房寺址)
이 사지(寺址)는 정동면 장산리 대산(垈山)마을 뒤 천금산(千金山)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절터를 중심으로 사방이 빙 둘러싸여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겼는데 속칭 ‘배방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방절(排房寺)이 옛날부터 이름나게 된 까닭은 고려 초기에 현종(顯宗)이 어린시절 한때를 이 절에서 보낸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을 비롯해 여러 향지(鄕誌) 배방사조(排房寺條)를 보면 현종에 관한 고사(故事)가 어김없이 실려 있다.

이와 같이 배방사(排房寺)는 고려 왕실과의 인연으로 명찰(名刹)로서의 영화를 누렸을 뿐 아니라 임금을 모셨다는 뜻의 일명 배왕사(陪王寺)로 이름을 고쳐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절의 창건 시기를 ‘조선 사찰사료’에 의할 것 같으면, 본래 북방계(北方系)의 절로서 신라 경덕왕 22년(763)에 대내마(大奈麻:품관 10 등) 공관(이순 혹은 이준)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다 절을 짓고 노곡사(蘆谷寺)라 했다고 한 것을 볼 때 이 절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사찰이라 하겠다.

이후 어떤 연유로 해서 이 절은 폐사(廢寺)되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다. 그래도 고려 현종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만큼 비록 유허(遺墟)로 변했으되 향토사적(鄕土史的)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현종이 어린시절(5~6세) 이곳에서 지었다는 사아시(蛇兒詩)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온다.

‘작디작은 꽃뱀 새끼가 난간(欄干)에 올랐고 나온 몸은 비단 같고 반점(斑點)은 아름답네, 이 작은 꽃뱀도 숲에만 살 것이라 말하지 말라. 때가 오면 하루에 용(龍)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사천/구경회기자
▲ 배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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