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의 진실
"사기"의 진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1.11.0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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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웅/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
지리산막걸리 학교 교장
“사기”는 물론 중국의 한 사서(史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역사를 위해서 역사를 쓴다’(다시 말하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는 역사서)는 관념은 다만 근대 역사가의 새로운 관념일 뿐이며 종래의 역사가가 역사를 쓰는 것은 대개 따로 어떤 ‘초자연적’목적이 있어서 역사적 사실을 빌려서 그 목적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각 나라의 종전의 역사서가 다 그러한 것이었으나 중국은 그것이 더욱 심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공자의 “춘추”는 표면상으로는 2백 년에 걸치는 한 역사서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사상과 위대한 도리’(微言大義)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후세 학자들은 그것을 ‘사(史)’라고 부르지 않고 ‘경(經)’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마천은 실상 춘추가(春秋家)의 대선생인 동중서에게서 수업한 제자로서 “사기”를 쓰면서 마음속으로 “춘추”를 견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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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자서’에서 첫머리에 동중서가 전하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거니와 그 말씀이란 “내가 공허한 말로 시비를 따지기보다는 역사상 인물의 적합성, 저명한 실제 행동을 더듬어 보는 것이 더욱 의의 있는 일이다” 라는 것이다. 그 뜻은 내가 본디 이상으로 삼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장차 백성을 깨우쳐 세상을 구하려는 것이나 다만 사실의 뒷받침이 없이 논의를 해보아도 절실하게 깨우쳐 줄 수 없으므로 역사상의 사실을 제시하여 더욱 직접적인 감동을 주고자 한다는 취지인 것 같다. “춘추”의 저술동기가 이미 이러할 진대 내심 “춘추”에 견주어 저술된 “사기”의 그것도 알 만한 일이다.

그는 ‘보임안서’에서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연구하고 고금의 변천을 통찰하여 일가의 설을 세워 보려고 하였다”고 썼으며 ‘자서’에서는 또 “유문을 수집하여 육경의 궐실(闕失)도니 부분을 보충하여 일가의 설을 세우며 서로 다르게 전하는 육경의 여러 설을 종합하고 제자백가의 잡다한 설을 정리하여 1본을 명산에 비장하고 부본을 경사(京師)에 두어 후세의 식자를 기다린다”고 썼다.
이로써 본다면 “사기” 저술의 최대 목적은 사마천 자신의 ‘일가의 설’을 발표하는 데 있었으며 순경이 “순자”를 쓰고 동중서가 “춘추번로”를 쓴 것과 그 설질이 꼭 같은 것이라 하겠으나 다만 그 ‘일가의 설’을 역사의 형식을 빌려서 발표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근대의 역사의 개념을 가지고 “사기”를 읽는다면 그것은 “사기”를 아는 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기”는 역사로서의 가치는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서’에 의하면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사기를 맡아보았다”고 하였다. 고대의 학술은 대개 관부의 전유물이었으며 사관은 그중에서도 특히 넓고 깊은 학문의 보유자였다. 그리고 사마담과 천은 한 대에 들어오면서 그 직책을 세습하여 온 것이다. ‘자서’에 말하기를 “그 백 년 사이에 천하의 전래문헌과 고사로서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이 없고 태사공의 자리는 우리 부자가 이어받아 왔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선 역사가들의 역사서술의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지금 이것을 십분 자세히 알 수는 없는 일이나 현존하는 몇몇 고사로써 본다면 대개 단편적인 집기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월별로 배열된 사실록이며 일정한 체계로 조직되어 전서의 규모를 정한 후에 각종 자료를 취사하여 구사한 것은 종전에는 없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사마천의 “사기”가 처음이었다.

사마천은 ‘자서’에 “나는 과거의 사적을 이른바 ‘기술하고’, 세전되는 문헌을 정리하는 것이지 ‘지어내는’(作)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겸손한 말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으나 역사를 쓴다고 할 때에 어찌 허황되게 사실들을 스스로 지어낼 수 있겠는가. 있는 사실을 ‘기술’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니 역사가의 유일한 임무는 ‘전래되는 것을 정리하는’ 데에 있으며 ‘정리’가 곧 창작인 것이다. 훌륭하게 정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학식과 천부의 재능에 좌우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정리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그 정리로써 자기의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의 으뜸가는 창작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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