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의 역대 상공업(商工業)의 전개과정
중국(中國)의 역대 상공업(商工業)의 전개과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09.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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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국립경상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강의)교수·한국국제대학교 석좌교수·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지리산 막걸리학교 교장

지난번에 이어 중국의 역대 상업(商業)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명 태조부터 중농억상 정책으로 관시사(管市司)를 두어 물가를 억제하고, 과중한 영업세를 부과했지만, 국내의 상업은 상당한 궤도(軌道)에 오르고 있었다.

국내로는 상품 종목별로 시장을 설립했으니, 성조(成祖)가 연경(燕京)에 정도(定度)한 뒤로는 저시(猪市) · 양시(羊市) · 우시(牛市) · 마시(馬市) · 과목시(果木市) · 매시(煤市) 등을 따로 개설했다.

국외로는 광주 · 천주 · 영파(寧波)에다 시박사를 두어 여전히 녹차 · 자기 · 칠기 · 생사 등을 수출하고, 향료 · 담배 · 산호 · 상아 등을 수입하였었다.

특히 명 성조(成祖) 때 정화(鄭和)를 서양에 7차례나 파견시켜 40여 개국과 관계를 맺는 동안(1405~1432) 국제무역의 통로가 넓어졌고, 처음으로 화교이민의 길도 트였던 것이다.

청대에는 아편전쟁 이래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으로 관세는 문란하고 외산(外産)은 범람하여 일반적으로 파국 직전의 실정이었다. 사민(四民)의 말단으로 천대받아온 상인은 겨우 염철(鹽鐵) · 표호(票號) · 당포(當舖) · 목상(木商) 등이 가장 치부할 수 있었고, 대개 광동 · 한구(漢口) · 주선(朱仙) · 경덕(景德) 등지가 활발했다.

강희(康熙) 연대에는 모든 항구를 개방하여 무역을 장려했으나 외국 상인들의 농간이 심해지자 건륭 말년부터 무역 폐쇄정책을 쓰고 겨우 광주 한 군데를 허용하였으나, 그것도 정부의 간섭 하에 「공행(公行)」의 중개를 받도록 제한했다. 이 제한은 외국 상인의 자유 활동과 무기 휴대, 외국 여인의 상륙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중국의 공업은 중일 청오전쟁(淸日甲午戰爭)이 끝난 1895년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을 세우기까지 비록 방대한 건축공업 · 조선(造船)공업도 있었지만, 모두가 자기(磁器) · 방직 · 철기 · 동기 · 제염 등의 수공업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떤 발명에 의한 창제도 공업의 일환이라면, 그 역사는 삼대 이전으로도 소급할 수 있다.

<주역(周易)>에는 은(殷)대에 이미 청동기(靑銅器)를 사용하였고, 하(夏)대에는 금석(金石)을 겸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동기의 생활 도구화와 잠사(蠶絲)의 발견이다. 산서하현의 서음촌(西陰村) 하대 유지(遺地)에서 고치의 화석이 발견된 것으로, 더욱 방증을 삼을 수 있다.

주(周)대의 공업은 이미 왕실의 직공을 서른 가지로 분류할 정도로 세분화되었는데, 그 중에 금속 · 피혁 · 염색 · 조각 · 목기 등을 공장(工匠)의 중요직으로 여겼고, 왕실에는 사공(司工)이라는 관리를 두어 백공(百工)을 감독했다.

서주(西周) 때에는 이미 철(鐵)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제련술까지 갖게 되었으나 철을 나쁜 금으로 보고 선용하지 않았다.

기술은 합금(合金)술을 익힐 정도로 발전했으니, 당시의 모든 종정(鐘鼎)은 동(銅)과 주석을 합금해서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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