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 왜 가는가?
아프리카에 왜 가는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0.19 16:5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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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원/남해 들꽃 자연의학센터 원장ㆍ미국 가정의학 전문의ㆍ전 미국 의과대학 교수

지난 7-8년 간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나는 여름 휴가를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보냈다. 케냐, 탄자니아, 말라위, 가나, 코트디부아르 등 여러나라를 다녀왔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1-2주 그 곳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보내는 그 시간들은 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귀중한 시간들로 내 마음 속에 채워진다.


몇 년 전에 이화여대에서 모임이 있어서 캠퍼스를 방문하게 되었다. 학교 입구에 스크랜턴 여사 서거 100주년 기념 행사를 안내하는 큰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이화학당을 시작한 사람이 스크랜턴 여사라는 단순한 사실만 알고 있던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미국 동부 출신으로 그녀 나이 40세 때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었다. 그에게 윌리암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의대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잠시 개업의로서 의사 활동을 하던 그가 하루는 갑자기 어머니를 찾아와 한국에 선교사로 가겠노라고 선언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온 그녀에게 청천벽력같은 예기치 않은 일이었으나 그녀는 곧 아들과 함께 한국에 갈 결심을 굳혔다. 스크랜턴 모자가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들어온 것은 1885년 이었다. 그들은 덕수궁 근처 정동을 중심으로 의료,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은 말로 할 수 없이 가난한 형편이었다. 특히 여자들은 집안 일이나 하지 교육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녀의 눈에 이 불쌍한 한국의 소녀들이 들어왔다. 평생 고생만 하고 불쌍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 소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측은지심이 그녀의 마음을 채웠다. 1886년 작은 집을 얻어 어렵사리 문을 연 이 학교에 학생들은 오지 않았다. 서양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 눈 빼먹고, 간 빼먹는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다. 시간이 지나며 학생들이 늘어나고 민비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화학당은 근대 여성 교육의 시발점이었다. 그 학교가 지금의 이화여대로 발전하였다. 명실공히 이화여대는 여자대학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대학이다.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중심으로서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1886년 작은집을 얻어 학교를 시작했던 스크랜턴 여사가 이 학교가 100년 후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명문여자대학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나 상상을 했겠는가? 아마 그런 생각은 꿈도 못 꿨을 것 같다. 그녀는 단지 불쌍한 소녀들을 돕고 싶었고 사랑했다. 이런 작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100년이 지나서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아프리카에 가기 시작할 때 내 마음에는 약간의 회의감이 있었다. 나는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아프리카에 가지만, 1-2주 그 곳에서 하는 봉사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짧은 시간, 제한된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내 시간과 물질만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나서는 내 마음이 바뀌었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그들에게는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큰 일이 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직 아프리카에는 급성 전염병이나 감염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단돈 1000원이 없어서 말라리아에 걸려도 약을 사먹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맨발로 다니다 발에 상처가 났는데, 항생제 치료를 못해서 나중에는 발가락을 절단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나는 단순한 진료를 하고, 치료를 하고, 준비해간 약을 전해주지만, 그들 누구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됨을 경험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또 한가지 귀중한 것은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먹을 것도 없는 어려운 환경이지만 작은 것에 감사하고 늘 웃는 그들의 낮은 마음은, 그렇지 못한 나를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외형적으로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러 갔는데, 실제로는 많은 것을 배우고 얻어오는 귀한 시간들이 되는 것이다.

올 여름에는 한 달 동안 탄자니아에 다녀왔다. 빅토리아 호수 근처의 작은 마을들, 세렝게티 옆의 작은 도시 무구무에서 진료하였다. 니에레레 지역병원에서도 진료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나라의 보건소나 도립병원 정도의 이름을 가진 병원인데, 의사는 대여섯명, 환자는 수백명이 몰려든다. 입원실, 수술실이 갖추어져 있으나 유명무실하다. 심전도 한대 없고, 하나 있는 초음파 기계는 고장난지 오래다. CT 스캔 같은 것은 꿈도 못꾸고, 말라리아, 장티푸스 외에 쓸 수 있는 변변한 약도 없다. 그곳에서도 가져간 약을 풀어놓고 현지 의사들과 함께 진료하였다.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귀한 마음을 가진 서양의 의사,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젊음과 인생을 바쳐서 우리를 위해 봉사했다.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짓고, 교회를 지으며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도 우리만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100년 전 우리를 위해 일했던 많은 서양 의사, 선교사의 희생과 수고의 바탕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프리카에 가는 것도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 된다고 생각한다. 작지만 아름다운 생각들이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나라를 바꾸는 큰 힘이 있음을 믿는다. 앞으로도 아프리카 봉사 활동은 계속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더 귀한 일들을 감당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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