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대통령의 죽음과 방혈치료
워싱턴 대통령의 죽음과 방혈치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5.11.10 17: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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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원/남해 들꽃 자연의학센터 원장ㆍ미국 가정의학 전문의ㆍ전 미국 의과대학 교수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죽음도 의학의 역사를 바꾼 경우 중 하나이다. 워싱턴 대통령은 은퇴 후 미국 버지니아주의 리치몬드에 있는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1799년 12월 말 아주 추운 겨울에 그가 아프기 시작했다. 고열이 나며 목구멍이 아프고 음식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앓게 되었다. 심한 급성 편도선염이다. 지금의 의학으로는 항생제와 진통소염제를 써서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항생제와 같은 약물이 없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급성 감염질환에는 몸에 있는 피를 일정량 빼 버리는 방혈치료라는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치료법이었다. 대통령 주위에 있던 주치의들이 모여 상의한 결과 방혈치료를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당시 문헌을 보면 일회에 한 pint (약 450ml)의 피를 뽑았는데, 한차례, 두차례 피를 뽑아버려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 둘째 날에도 두 pint를 뽑았으나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셋째 날에도 두 pint의 피를 뽑았다. 그 이후 대통령의 맥박이 약해지고, 의식이 흐려지며 심장 박동이 멈추었다. 사흘 동안 3리터 이상의 피를 뽑힌 워싱턴 대통령은 감염 질환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피가 없어서 죽게 된 것이다.


방혈치료는 인류 역사상 3천 년 이상 이어져 온 가장 오랫동안 행해진 치료법이다. 3000년 전 고대 이집트 문헌에 나오며, 고대 힌두 문명에서도 쓰인 기록이 있다. 고대 시리아 문명에서는 거머리를 붙여 피를 빼서 치료했다고 하고, 고대 그리이스 시대에는 아주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1900년대 초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치료법인데, 여드름, 천식부터 암이나 천연두의 치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였다. 피를 내는 도구로 바늘, 칼, 상어 이빨, 화살촉, 면도날, 거머리 등이 이용되었다. 적게는 한 pint에서 부터 많게는 환자가 실신할 때까지 피를 뺐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의학의 패러다임의 변화로 중단된 이 치료법은 현재는 헌혈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의사의 주된 치료가 이 방혈치료였고, 면도칼을 다루던 이발사가 방혈치료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이발소에 붙어 있는 흰색, 파란색, 빨강색 띠가 돌아가는 원통형의 표시판은 흰 거즈, 정맥피, 동맥피를 상징하며, 방혈 치료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워싱턴 대통령의 죽음 이후에 방혈 치료의 효과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 의사들은 급기야 1900년대 들어서 방혈치료를 금지하자고 결정했고, 현재는 인도나 아프리카의 민간 치료사들이 이 치료법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대에 들어서 유럽의 의사들이 다시금 방혈 치료의 효과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찾고 있다. 시작은 몇몇 의사들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방혈치료는 3000년 동안, 그것도 한 지역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던 치료법인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 오랜 시간동안 명맥을 유지했을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확실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었다.

John Murray라는 의사는 소말리아 난민 캠프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난민 캠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게다가 먹는 음식도 모자라서, 영양 상태는 형편없고 모두 빈혈 상태에 있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영양상태가 좋지않으니 결핵, 브루셀라증, 말라리아 등 아프리카의 많은 감염성 풍토병에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며 긴장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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