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비운의 천재물리학자 이휘소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2018-05-08     경남도민신문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비운의 천재물리학자 이휘소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계 이론 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 미국명 벤자민 리)박사가 세상을 떠난지 41년 되는 해다.

한국인으로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천재 물리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고(故) 강주상 고려대 교수가 쓴 이휘소 평전이 다시 출간됐고 노벨수상자를 포함한 여러 과학자가 모여 이박사의 연구업적을 되돌아보는 특별강연회가 열렸다.

이휘소 박사는 일제강점기이던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과학잡지를 즐겨 읽던 평범한 소년이었고 이 박사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검정고시를 친 그는 1952년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 물리학에 큰 흥미를 가져 전공을 바꾸려 했지만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자 이 박사는 미군이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마이애미대 물리학과에 편입 이때부터 아침 7시에 일어나 전공 수업을 듣고 자정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 그 결과 그는 미국에 건너온지 1년반만에 물리학과를 최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하여 졸업했다.

이 박사는 25세이던 1960년 펜실베이니아대 조교수로 임용됐고 이어 2년 뒤 부교수 다시 2년 뒤 정교수로 고속 승진했다. 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 페르미 연구소 부장 시카고대 교수 등 거치며 미국 물리학계에서 명성을 쌓았다.

이휘소 박사는 논문을 60여편 남겼는데 인용된 횟수가 1만4000회에 달했다. 학계에 미친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입자물리학을 연구했거나 그의 도움으로 이론을 완성한 수많은 과학자가 훗날 노벨상을 받았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압두스 살람은 수상 소감에서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고 19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토프트는 “이휘소를 만난건 하늘이 내게 내려준 행운이었다”고 말했었다.

생전에 이 박사는 몇날 며칠 방에서 나오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해 ‘속옷도 안갈아 입어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해요 마흔두 살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그가 살아 있다면 한국계 최초의 노벨 수상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 노벨상 버금가는 업적을 세웠으나 아까운 인재가 비운의 운명으로 죽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크나큰 손실이라는 사실 올해 사망41주기를 맞아 재조명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