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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6회 국민강좌] 홍암 나철 선생의 민족사관과 독립운동 - 국학원
icon 정길선
icon 2012-04-05 14:08:53  |  icon 조회: 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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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6회 국민강좌] 홍암 나철 선생의 민족사관과 독립운동 - 국학원

[6회 국민강좌] 홍암 나철 선생의 민족사관과 독립운동
박성수 | 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대한상고사학회 회장




포명서의 내용
1우리들 13인은 태백산(백두산) 대숭전大崇殿에서 본교 대종사 백봉 신형을 배알하고 단군교의 오묘한 교의와 역사를 계승하여 우리 모든 동포형제자매에게 삼가 고합니다. ?대황조 단군의 가르침은 高句麗 시조 동명성왕을 거쳐 을지문덕, 광개토대왕에 이르렀고 신라와 百濟 또한 고구려와 같았으나 우연히 석가의 교(불교)가 유입되더니 백제가 감염되어 먼저 망하고 고구려 또한 남북으로 불법(불교)의 침입을 받아 쇠멸하였습니다. 이에 그 나라의 신하 대조영이 분개하여 경전經典을 들고 말갈 땅에 도피하여 渤海國 300년의 터를 닦았습니다.?新羅는 통일군주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김유신 시대에 태백산 이름을 영남으로 옮겨 본교(단군교)의 중흥을 꾀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불설(불교)과 유론(유교)이 성행하여 역시 나라가 쇠망하였습니다. ?高麗 태조 왕건은 단군교를 독신篤信하여 나라 이름을 단군교의 종국인 고구려를 본 따서 고려라 하고 묘향산에 영단을 세우고 강동 대박산大朴山에 선침仙寢(단군능)을 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이 단군교를 전폐하고 불법을 좋아하니 몽고의 침략을 받아 생민生民이 도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우리 朝鮮 태조(이성계)께서는 태백산(백두산) 남쪽에서 발상하여 단군 대황조의 사전祀典을 준행하시고 단군교를 위하여 불교를 엄히 배척하였으나 유교가 점차 성행하고 단군교가 쇠퇴하니 유식자는 모두 걱정하였습니다. 남효온이 그 좋은 예입니다. 또 세조께서는 친히 강화도 마니산에 오르시어 제천 보본報本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대의 유학자들은 단군의 가르침을 전혀 연구하지 아니하여 공자정주孔子程朱 위에 단군이 계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나라를 세우신 성조聖祖를 숭배하지 않았고 자신을 낳고 기르신 성신聖神을 존경하지 않았으며 자기 집을 지켜온 성교聖敎 받들어 모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조상, 남의 귀신, 남의 종교를 받들어 모셨으니 어찌 이렇게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하였단 말입니까. 그러나 대황조 단군께서는 이러한 후손을 보고 일시에 재앙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덕음德音을 내리시지 않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이러한 때에 우리 단군교가 등장하였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바위 밑의 죽순은 반드시 옆으로 비껴서 솟아나는 법입니다.?오늘날 조선이라 함은 단군조 중엽의 배달국을 한자로 사음한 말이요 태백산이라 함은 단군산이란 뜻이요 패강浿江이라 함은단군의 강이란 말이다. 임검任儉이라 함은 임금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신인神人란 뜻이었습니다. 또서울西鬱 즉 국도란 말은 단군조 말에 천도한 부여국 가운데 한 지명이었습니다. ?무릇 튼튼한 물건을 단단檀檀이라 하고 매우 위태한 것을 탈脫이라 한 것도 모두 불교 유입 때에 나온 말로 단단탈탈가檀檀脫脫歌家 그 한 예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 많은 단군 문화가 남아있습니다. 가령 영금 단계 성조신이 그렇습니다.?의복에 있어 하얀 영금領襟을 다는 습속은 단군을 사랑한다는 태백산 표장表章이었고 아이들이 머리에 맨 단계는 발해국에서 부모들이 단군에게 아이의 출생은 고하고 아이의 무병장수를 비는 글을 오색 헝겊에 써서 아이의 머리에 매고 영계靈戒를 받던 풍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집안에 모신 성조신成造神 역시 본시 단군이었던 것인데 모두 잊어버린 것이니 한심합니다. 또 단군상이 그렇고 성황당 고수레 등이 모두 유서 깊은 우리 문화유산인데 이것을 모두 잊어버린 것입니다.매년 10월 집집마다 단군을 모실 때 단군상을 걸었는데 그 그림은 신라의 명공 솔거率居가 그렸다고 고려 시대의 평장사平章事 이규보李奎報가 우리에게 전한 바 있습니다. 이규보는 “고개 넘어 집집마다 신조상의 절반은 모두 단대 명공이 그린 것이다”(嶺外家家神祖像當年半是名工)고 하였으니 오늘날 마을마다 있는 선령당仙靈堂은 단군의 명을 받아 산을 뚫고 강을 막던 팽오彭吳 그 분이었던 것입니다. 농부들이 들에 나가서 점심을 먹을 때 먼저 밥 한 숟갈을 땅에 버리면서 고수레라고 소리 지르는 것도 단군의 명을 받아 일하던 고시高矢에 대한 제사에 유래하였습니다. ?이제 단군신앙의 뿌리를 입증해 봅시다. 만주에 가면 단군 유허지가 남아 있고 일본에 가면 임진왜란 때 끌려 간 도공들이 단군을모시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데 이것은 집집마다 단군을 모셨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만주 철령 등지의 왕왕 수풀 속에 고묘古廟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태고적의 단신제壇神祭 유허라고 합니다. 단壇은 단檀의 잘못인데 이것은고구려 때 단군교가 가장 성할 때 단군을 숭배하던 확실한 증거입니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 시마즈島津義光가 우리나라 도공 18개 성씨 가족을 납치하여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정착시켰는데 그 18개 성씨들이 본국에서의 옛 습속을 그대로 따라 하기를 단군 성신을 봉숭하여 집집마다 제사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단군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당부하였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단군께서는 우리들 후손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서로 싸우고 서로 헐뜯고 서로 속이고 서로 죽이고 있으니 이렇게 무수한 죄악들로 우리는 재앙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단군의 자손된 형제자매들아! 형은 동생을 권하고 누이도 동생을 권하여 만억인까지 동심동덕하여 형의 경사가 동생의 기쁨이 되고 언니의 불행이 동생의 슬픔이 되게 합시다. 지자지혜至慈至惠하신 단군께서는 일인一人이 선행善行하면 중인이 권선하였다 하여 루 그 복을 하사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이 나의 복이요 남의 악을 보면 수수방관하지 말 것입니다. 즉 그것은 나의 악이요 나의 벌이기 때문입니다. 일신에 일사一事가 착하면 그 몸이 편안하고 일사가 악하면 그 몸이 위태롭습니다. 한 집안에 한 사람이 착하면 그 집은 보전되지만 한 사람이 악하면 그 집이 망하느니라. 한 나라에 일세가 착하면 그 나라가 흥하지만 일세가 악하면 그 나라가 망하는 법입니다.

5. 단군교도들의 독립운동

(1) 인맥 / 선언서 / 단체
- 대종교에서 직접 활동한 인물인 나철 김교헌金敎獻, 서일徐一, 윤세복尹世復, 김윤식, 김인식, 이기, 오기호 등을 포함시키면 그 인맥은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이들은 의열 투쟁 독립전쟁 3.1운동, 임시정부 등 거의 모든 독립운동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국어 국사 등 문화운동 분야에도 엄청난 공헌을 남겼다.
1) 한글運動의 人脈 - 주시경, 지석영, 김두봉, 이극로, 최현배
2) 民族史學의 脈 -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류근, 정인보, 이상룡
3) 抗日獨立運動의 脈 - 신규식, 이동녕, 박찬익, 조성환 등

▣ 독립운동의 인맥
-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정인보, 장도빈, 신규식申圭植, 주시경, 김두봉, 이시영李始榮, 최현배,이범석李範奭, 신성모, 이동녕李東寧, 김좌진金佐鎭, 홍범도洪範圖, 조완구, 조성환, 정관, 이홍수, 정원택, 맹주천, 이상훈, 안호상, 나운규, 김두종, 이상룡李相龍, 이상설李相卨, 김동삼, 김승학金承學, 안희제安熙濟, 김두봉金枓奉, 지석용, 채동선, 홍명희, 안재홍, 정열모, 안제세, 유동열柳東悅, 서상일徐相日, 박찬익朴贊翊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항일운동가들이다. (황민호, 2001, 「대종교의 항일민족운동」, 『일제하 경기도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경기문화재단, 308~31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 의정원議政院 의원 29명 중 대종교 원로가 21명이나 되었다. 의장 이동녕李東寧과 정부 각료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2)무단통치하의 대한광복단 / 조선국권회복단 / 대동단 선언 / 대한독립 선언

(3)한국고유의 독립사상
1945년 4월 11일 / 중경 임시정부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 이 자리에서 신익희申翼熙(1894-1956)는 임시정부의 약사보고略史報告를 하는데 3.1운동은 우리나라에 고유한 독립사상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우리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은 3.1운동의 산물이라 말합니다. 3.1운동은 우리 고유 전통적인 독립사상과 일본제국주의에 반항하는 심리와 윌슨이 부르짖은 민족자결 등으로서 전 민족이 일으킨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 한국의 고유 전통적인 독립사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단군정신과 민족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4) 민족사관과 한글의 수호 - 민족사학의 선구자 신채호


▣ 우리 역사의 주제
1) 중국과 인도의 非我文化를 수입하여 민족의 활기가 여위여 강토의 범위가 줄어들었는가.
2) 西歐文化의 奴隸가 될 것인가. 이를 소화하여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3) 我의 문화상 創作이 왜 고립적이요 단편적이었나.
4) 北伐進取의 思想이 왜 쇠퇴 하였는가
5) 왜 여진과 흉노 등이 我와 분리한 뒤 합하지 못했는가.
6) 사대주의를 滿抱하여 彼國을 我國이라 하며 我國을 小國이라 하여 수백 년간 대동인사 를 混倒케 하였다.

- 여진족 선비 몽고 흉노는 본디 我의 동족이었다. 我에서 분리한 동족이다.
- 일본은 我의 문화의 강보에서 자라온 민족
- 한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민족이 강하고 타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민족이 열퇴하였으니 오호라! 이는 4천년 변하지 않는 定例였다.

- 수백 년간 유일무이한 교과서가 童蒙先習이었다. 그 말미에 쓰기를 “아국이 비록 偏在海隅하고 국토가 遍少하나 禮樂法度 衣冠文物이 모두 華制를 모방하여 華人이 말하기를 小中華라 한다.”
그러니 동몽선습은 의뢰심을 조장하고 자주정신을 말살하고 비록 장창이나 대포가 없고 전선 철도가 없더라도 좋은 역사 교과서는 없을 수 없으니 좋은 역사 교과서가 없는 날 나라가 망하는 날이다.

- 동몽선섭으로 인하여 한국인은 1)일본의 선도를 바라고 2)서구의 원조를 바라고 3)청국의 무력을 차용하기를 바랐다.

나철을 역사적 무명인으로 만든 세력은 단군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에게 봉사했던 식민주의 사학자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단군교를 탄압하고 불법화시켰다.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던 일제지만 단군교에 대해서는 절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단군이야 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었기 때문에 단군교를 인정할 수 없었고 나철 또한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철을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인데 최근 나철을 재평가하는 글이 몇 편 나왔으나 해방 후 반세기가 넘은 시점에서 겨우 일어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에 [우리역사바로 알기시민연대]에서는 나철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그 결과를 단행본을 엮어냈다.

나철은 역사적으로 이름 없는 무명인이다. 어떤 역사책에도 나철은 큰 인물로 취급하지 않았다. 나철이 창시한 단군교(대종교)가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뿐 아니라 대종교를 믿으면서 독립운동을 한 위대한 인물들이 대종교 교도였다는 말도 하지 않고 숨겨왔다.

나철의 추종자들은 3?1운동을 일으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대첩을 일구어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일을 해낸 인물과 단체는 달리 없다. 그런데도 나철과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를 추종했던 애국자들의 이름은 우리 독립운동사와 근대사에서 지워져 없는 것이다.

1942년 11월 마침내 임오교변壬午敎變을 당하여 단애 윤세복과 백산 안희재 등 21명이 검거되어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받다가 10명이 옥사하였다. 이때 압수당한 서적이 총본사에서만 해도 23,000여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나철에 대한 편견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철이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으로 민족사관이 있다. 이마저도 우리 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이요 대종교 사학이라 하여 외면하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할 것이다.
2012-04-05 14: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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