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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4회 국민강좌] 新羅 國王의 皇帝的 位相 - 국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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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2012-04-18 13:56:47  |  icon 조회: 3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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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24회 국민강좌] 新羅 國王의 皇帝的 位相 - 국학원

[24회 국민강좌] 新羅 國王의 皇帝的 位相
김창겸 | 신라사학회 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구려역사의 중국편입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고구려 문제만이 아니라 조만간 신라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입장이다. 발해와 신라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신라가 제후국이 아닌 중국천자와 대등한 황제국(皇帝國)으로써 당당한 자주국가임을 밝혀, 앞으로 예견되는 우리나라 역사왜곡문제에 대응하고자 한다.

전통시대 왕조국가는 황제국인가 제후국(諸侯國)인가에 따라 권력구조의 틀과 형식이 다르고 최고통치자의 대외적 지위와 국가의 위력도 다르다.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근접한 나라들은 중국을 향해서는 번국(蕃國)으로 국내서는 독립(獨立)의 이중체제(二重體制)를 취하였다. 이는 중국에 대해 체면상 양보하지 않으면 토벌을 당할 위험이 있고, 국내서는 절대 존엄하지 않으면 君主로서 지위를 보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자개념은 칭제건원(稱帝建元)?신성족(神聖族)관념과 더불어 조(祖)?종(宗)’과 함께 제?성상?성왕?태왕?대왕?전하(帝?聖上?聖王?太王?大王?陛下)및 태후?후?태자?절일?제소(太后?后?太子?節日?制詔)의 용어를 사용했다.

??삼국유사??에 혁거세의 탄생을 “今天子已降”(금천자기강)으로, 제2대 남해왕조에서는 남해·노례·탈해(南海·弩禮·脫解) 3王을 “三皇”(삼황)으로 표현하였다. 혁거세는 바로 천자이니 그 아들은 황제가 당연했기 때문이다. 21대왕 소지마립간도 백성들은 萬乘의 지위인 천자로 인식했음이 확인된다. 소지마립간이 지금의 경북 봉화지역에 나갔을 때 한 토호세력가가 비단에 음식을 싸서 주었다. 그 비단보자기 안에는 음식대신 나이어린 예쁜 소녀가 들어 있어 이를 이상히 여긴 왕은 거절하였다. 궁으로 돌아온 왕은 생각할수록 그 소녀가 생각나서 몇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다녀오고 소녀는 임신이 되었다. 어느 날 고타로(안동)에서 한 노파를 만난 왕은 자신의 평을 알아보기 위해 넌지시 요즘, 나라의 왕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노파는 “세상 사람들은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내가 알기로는 성인이 아니다. 성인이라면 어찌 평민의 옷을 입고 남몰래 남의 집을 드나드는가? 임금은 만성의 지위에 있는 법, 지금의 왕은 마치 용이 물고기 옷을 입고 있는 격이다.”라고 했다. 만성의 지위란 황제를 이르고 만세를 받는 지위이다. 제후국의 왕은 천세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2편에 지철노왕(智哲老王)의 부인을 ‘皇后’(황후)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황후는 곧 황제의 부인이다. 황제의 정실 아내를 후(后)라 하고 그 외는 비(妃)라 하고 제후(諸侯)의 정실 아내는 비(妃), 그 이외는 빈(嬪)이라 했다. 지증왕의 배우자가 황후(皇后)칭호를 받음은 지증왕이 황제임을 의미한다.

같은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에서는 진평왕을 “?雍(군웅 즉 天子)”으로 표기하고 황룡사9층탑 조에는 문수보살이 중국에 유학 온 신라의 자장율사에게 신라는 ‘不同東夷共工(野蠻共工)之族’(부동동이공공(야만공공)지족)이라고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共工은 본래 효순시대(堯舜時代) 의 흉폭한 야만족으로 신라인은 ‘동이야만족’하고는 같지 않다는 의미로서 신라의 독자 세계관을 보여준다.

진흥왕순수비에서 진흥왕, 태왕(太王)은 황제적 위상을 가진 삼국의 태왕이다. 왕을 칭하고 있는 신라의 갈문왕의 존재도 왕중왕(王中王)인 태왕체제다. 특히 태왕의 존재를 명시한 신라의 마운령 진흥왕순수비에는 ‘帝王’이라는 칭호가 보이고 짐(朕)이나 순수(巡狩)와 같은 황제적 용어가 사용되었다. 진평왕도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천양옥대(天賜玉帶)를 성제대(聖帝帶)라고 한 것은 진평왕 지위를 제왕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태왕과 황제는 위상이 서로 연결되는 호칭임이 확인된다.

君主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대부터 진덕여왕대까지 建元? 開國 ?泰昌? 弘濟? 建福?仁平?太和(건원?개국?태창?홍제?건복?인평, 태화)라는 고유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독자적인 연호사용은 신라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는 나라를 뜻한다. 왕위를 이을 아들의 칭호도 황제국에서는 太子라 하고 제후국에서는 世子라 하는데 신라는 왕위계승자를 대체로 ‘(王)太子’라고 하였다. 진흥왕이 556년 3월 왕자 동륜( 銅輪)을 계승자로 태자에 책봉하였다. 비록 皇太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천자국의 신라왕태자는 같은 의미이다.

도교에서의 최고신, 천황대제(天皇大帝)는 자궁(紫宮)에서 四方을 제어한다고 한다. 진흥왕이 황룡사(皇龍寺) 자리에다 세우려 한 신궁(新宮)이름을 자궁이라 했고 진흥왕순수비 및 창녕비에 진흥왕이 사방군주(四方軍主)를 대동하거나 사해(四海)를 통치하는 제(帝)로 설정되어 있음도 진흥태왕(眞興太王)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한 독자적인 천하관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북한산 비봉과 마운령, 황초령 등 높은 산꼭대기에 비를 세웠다. 이를 지금까지는 영토를 확인한 순수비나 척경비로 이해하였으나 그 보다는 진흥왕이 정상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자신이 천자적 존재임을 드러낸 봉선(封禪)의 기념물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명확할 듯하다. 또 선덕여왕(善德女王)을 “聖祖皇姑(성조황고)”라 존숭(尊崇)한 것 또한 도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신라 중고기 太王의 위상은 帝王에 해당하는 중국 皇帝에 대응하는 호칭이었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도 탈해왕을 비롯하여 미추왕, 진지왕, 선덕여왕의 죽음을 崩이라 하였다 (제후는 ‘薨’)

신라는 삼국 말기에 접어들어 독자적인 연호 사용을 포기하고 당의 연호와 복색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고유의 전통적인 황제관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중대의 신라 국왕은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의 “尋之帝鄕始制鼓延”심지제향시제고연)과 高仙寺誓幢和尙塔碑銘(고선사경동화상탑비명)의 “長辭帝闕”(장사제궐)과 같은 글귀의 ‘帝’자는 신라의 王者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듯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였으며 지배층의 자주적 세계관의 흔적이다. 소정방(蘇定方)에 대한 김강신(金庾信)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태도 역시 신라 본위의 天下觀과 무관하지 않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中에는 소정방이 신라에서 쫓겨 가왕 앞에서 이르기를 “신라는 인군(人君)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섬기기를 부형(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도모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에서 당대인들이 신라를 “聖代”라고 한 것은 신라를 이상국가로 일컬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太宗이라는 시호(諡號)는 황제의 시호였다. 이때 당에서 이 시호를 폐지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신라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황복사금동사리함명문에서 효소왕의 어머니를 ‘神穆太后’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짐(朕)이라 했고 죽음을 붕(崩)이라 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을 삼한일통의 영웅으로 묘사하면서 나당전쟁으로 자주성을 강화하고 토착사회의 천신사상(天神思想)의 한계를 극복하고 유학의 천자관념이나 천명사상(天命思想)으로 왕권의 전제화에 성공하였다. 신라의 통일을 ”六合의 倂呑“이라고 한 글귀가 보이는데, 여기서 六이란 天地와 四方, 즉 天下를 뜻하며 천하를 아울렀다는 의미이다. 신라중심의 방위는 唐과 인도의 천축(天竺)을 서로, 발해를 북으로, 일본을 남으로 보았다.

신라중심사상은 통일 후 685년(신문왕 5)중국 우(禹)나라황제가 만든 천자국의 지방제도를 본 따 삼국의 옛 땅에 각각 3주씩 설치하여 전국을 九州로 나누었다. 그리고 토함산을 동악, 지리산을 남악, 계룡산을 서악, 태백산을 북악 팔공산을 중악이라 하여 五岳을 상징했다. 오소경(五小京)은 신라 영토를 小天下로 본 것이며 東京과 함께 中原京?西原京?南原京?北原京으로 신라의 왕이 중앙에서 지역적?종족적으로 天下를 지배한다고 상정했던 天下思想이다. 이런 중앙의 황제, 신라국왕은 주변국을 제후국에 봉하였다. 탐라국(耽羅國)을 속국으로 조공(朝貢)을 받았고 고구려의 귀족 출신 안승(安勝)을 고구려왕(뒤에 報德國王)으로 책봉하고 표문(表文)을 받았으며 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하자 그를 대아찬(大阿?)에 책봉하므로써 탐라와 보덕국(報德國)과 발해를 번국으로 설정하고 그 우두머리를 제후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황룡사9층탑의 건립은 1층을 일본(日本)에 2층을 중화(中華), 3층 오월(吳越), 4층 탁라(托羅), 5층 鷹遊, 6층 말갈(靺鞨), 7층 단국(丹國), 8층 여적(女狄), 9층 예맥(濊貊) 등 주변국가와 세력에 대응시켜 이들 九韓을 신라의 조공국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九韓來朝”(구한래조)의 표현은 주변국들보다는 우월한 입장에서의 신라중심사상을 갖고자 한 의식의 표출이었다. 신라인들의 세계인식 또한 686년에 세워진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에서 ‘四海’와 ‘萬邦’이라 하여 임금의 덕을 칭송한데서 확인된다. 735년(성덕왕 34)에 일본에 간 김상정( )은 신라를 ‘王城國’(왕성국)으로 종주국(宗主國)의 사절(使節)임을 자처하였듯 6?7세기 신라사람들은 신라를 천하의 중심이 되는 불국토(佛國土)이면서도 군자국(君子國)으로서 용맹 과감한 충신(忠臣)인 국가관(國家觀)?세계관(世界觀)을 가졌다.

하대신라의 첫 왕인 원성왕(元聖王)도 황제칭호를 사용한 듯하다. ‘元聖王’이라는 시호는 성왕(聖王)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시조(始祖) 성왕을 의미한 것으로 신라 하대의 새로운 오조제(五廟制)에서 그를 시조태조대왕과 함께 따로 모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숭복사비?에서 ‘뛰어난 임금’을 뜻하는 “聖祖”와 공훈이 큰 先祖, 특히 開國의 基業을 닦은 帝王’을 의미하는 ‘烈祖’로 표현되고 존숭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시대 군주의 시호를 직접 황제로 지칭한 기록은 없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유교적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치중하여 당의 제도와 문화를 모방하여 우리 고유의 제도?습속?언어를 폐기 매몰시켰다. 통일신라 이후 모든 정치제도가 중국식 모방의 환화주의(漢化主義)를 취하여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황제로 지칭된 군주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여러 곳에 있다.

당대에 작성된 금석문은 후대에 편찬된 문헌기록의 표기보다 한층 사실에 가깝다.
758년(천보 경덕왕 17) 건립된 ?갈항사석탑기?에는 원성왕을 “敬信大王”(경신대왕), 그의 어머니를 “照文皇太后”(조문왕태후)로 표기하고 원성대왕(元聖大王)?헌덕대왕(憲德大王)?흥덕대왕(興德大王)?민애대왕(敏哀大王)?문성대왕(文聖大王)?경구대왕(慶膺大王문성왕)?경문대왕(景文大王)?정강대왕(定康大王)?헌간대왕(獻康大王)?진성대왕(眞聖大王)?효공대왕(孝恭大王)이라 표기함은 당시 금석문에는 당대의 양상과 사고가 그대로 반영된 표기이므로 원성왕재위 시 황제지위여부는 신빙성이 강하다.

890년(진성여왕 4) 건립된 ?月光寺圓朗禪師塔碑?(월광사원낭선사탑비)에도 경문왕을 ‘皇王’(황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왕이란 황제나 천제로 여기는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본다.

헌강왕 때의 ?보림사보조선사탑비?와 정강왕 때의 ?사림사홍각선사비?, 최치원(崔致遠)의 ?上宰國戚大臣等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상제국위대신등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에서와 같이 헌강왕을 성상(聖上)으로 표현하였다. 성상은 聖王과 같은 말로서 지덕을 구비한 훌륭한 천자와 제왕에 대한 경칭이다. 그들의 배우자 또한 皇后라고 표기한 것도 많다. ?開仙寺石燈記?(개선사석등기)에는 ‘文懿皇后’(문희황후)라고, ??삼국유사?? 王曆에 제44대 민애왕비를 ‘无容皇后’선용황후)와 제48대 경문왕비를 ‘文資皇后’(문자황후)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의 왕후가 왕비보다 격이 높은 지위로 皇后의 남편은 皇帝로 지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의 長子는 물론 次子, 심지어는 同母弟와 姪까지도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제도를 살펴볼 때, 신라 하대는 제도적으로 황제국이며, 왕위의 적장자?부자계승을 이상으로 하는 부계친계승으로 왕통을 유지하였다. 당시 국제관계상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新撰姓氏錄??(신선성씨록)에 의하면 우노련(宇努連)의 성씨는 그 조상이 신라황자(新羅皇子) 김정흥(金庭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정흥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련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8세기 후반이후 도래계(渡來系) 씨족들이 자신의 조상을 왕족으로 하는 계보를 만들 때, 당시 일본인들은 신라의 왕족을 황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에서 건너온 신라왕족의 성인 김씨를 사용한 金庭興을 황족의 아들을 의미하는 ‘皇子’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한편 왕의 죽음과 장례를 崩과 因山, 명령을 詔?勅으로 표현하여 황제를 상징하는 특수용어가 사용되었고, 종묘제에서조차 실제는 천자 7묘제였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신라 하대에도 封爵制에 의한 諸侯制度를 시행하였다. 그 예로 원성왕 2년에 자신의 즉위시 경쟁자였던 김주원(金周元)을 명주군왕(溟州郡王)에 책봉한 것을 들 수 있다. 김주원은 명주에 성을 축조하고 ‘長安’이라는 나름대로의 治所를 갖추고 명주(郡)국이란 국호를 사용하였다. 신라 하대 왕들이 직접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당시 신라인들이 독자적 연호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중국과의 외교에서 예의상 사용을 피했거나, 또는 고구려에 독자적인 연호가 있었음에도??삼국사기??에서 보이지 않듯이 편찬자들에 의해 기록의 누락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왕위를 차지한 王系는 왕통의 독점적 유지를 위하여 同一家系內에서 근친혼을 행하면서 왕통의 혈족범위를 협소화시켰고, 王家의 고립화를 초래하였다. 왕위계승에서 골품제가 생명력을 가졌던 것은 진성여왕이 마지막인 듯하다. 이후 삼국쟁패기에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고려의 왕건(王建)이 서로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신라왕실을 중심체계로 인식하는 존왕인식(尊王意識)이 나타나 있다. 당시 신라가 제도적으로는 황제국체제였고 외형적으로 최고통치자가 황제위상을 가졌다고는 하나, 실제는 하대 초를 제외하고는 빈번한 왕위쟁탈전으로 중앙과 지방의 세력다툼이 심하여 경제와 문화가 파탄되어 왕조의 멸망을 가져왔다. 그리고 통일신라에 존재하였던 황제?황족적 지위와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상정한 천하관은 고려왕조로 이어졌다.
2012-04-18 13:5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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