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 지켜온 역사 산물, 성곽의 보존과 활용(3)
우리 삶 지켜온 역사 산물, 성곽의 보존과 활용(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24 18: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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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교/진주문화원 연구실장·문화재청 무형유산지기

고려는 북방의 영토 확장에 많은 힘을 기울여 대동강 이북의 국경지대에 주진(州鎭)을 설치하여 성을 쌓고 장정과 백성들을 옮겨 살면서 방위 태세를 갖추었다. 이들 주진성은 후에 변방 읍성이 되었으며 대개 평산성 형식이었다. 또한 각 해안에도 왜구와 여진의 해적을 막기 위해 주진성이 점차 증설되었으며 이에 따라 내륙지방에도 많은 읍성이 축조되었다. 순수한 평성으로 된 읍성은 조선 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성은 우리나라 성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형식은 입지 조건과 지형 선택의 기준에 따라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구분된다. 테뫼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른 모습으로 대개 규모가 작은 산성에 채택되었다. 포곡식은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한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싸인 주위의 산릉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이다. 행성(장성)은 고구려 영류왕 때, 백제 진사왕 때, 신라 성덕왕 때 장성을 설치하였다. 현재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신라가 왜적을 막기 위해 축조한 관문성이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거란과 여진에 대한 대비책으로 천리장성을 축조한 사실은 유명하다. 조선시대 세종 때 4군6진 설치로 국토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해 여러 곳에 소규모 행성들이 축조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영조 때 압록강 변의 영토에 많은 행성들이 시설되었다. 기타의 성으로 서울 동쪽 한강변에 있는 백제시대 풍납토성은 평지에 축조된 토성이며, 임진강변에 있는 육계토성도 이와 비슷한 토성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경남 연해지방에 주둔한 왜군들에 의해 축조되어 몇 개소가 남아있는 일본식 성곽도 있다.


대부분의 성곽은 성문, 성벽, 그리고 성내 시설 등의 3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성문으로 이는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유리할 때는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시키는 통로이다. 성문에는 성문의 크기보다 작은 암문(暗門)이 있다. 이는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한 성문의 일종이다. 성곽에서는 배수가 필요한 곳에 반드시 수문 또는 수구가 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옹성과 적대가 있다. 옹성은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성벽을 말한다. 적대란 성문 좌우에 설치한 치를 적대라 하여 체성의 치와 구분하였다. 이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주변 가까운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만든 방어 시설물이다.

다음으로, 성벽에서 근본을 이루는 것이 체성인데 성곽의 몸통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성벽이다. 성벽의 높이란 체성의 높이를 두고 말한다. 체성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을 여장이라 한다. 여장의 한 구간은 타와 타구를 합한 것으로 타구 설치 역시 총안과 같은 기능이었다.

성벽의 외벽 면에 수직에 가깝게 끊어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한 현안, 성곽에서 성벽에 부착된 치의 일종으로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각루가 있다. 성벽의 일부를 지형에 따라 좁게 성벽을 성 외부로 길게 내뻗어 양쪽에 여장을 쌓은 성도인 용도가 있다. 또한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성곽시설의 하나인 해자가 있다.

그리고, 성내 시설로 산성의 경우 유사시 끝내 항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인 우물, 창고건물 등을 준비해 둔다. 전투 시 군사지휘에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 성곽을 중심으로 한 성 내외의 도로망, 그 외에도 봉수대와 노대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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