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풍지
문풍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2.28 18:5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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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 수필가

이렇게 추운 겨울밤이면 가끔 어릴 적 살던 옛집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 삐걱거리며 여닫던 방문과 문풍지를 생각한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촌 가옥에 달린 방문은 대부분이 나무로 만든 여닫이 문이었다. 이 목문(木門)은 4각 문설주에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살대를 만들어 끼우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라 완성하였다. 바깥문설주 가운데는 문고리 쇠가 붙어 있었고, 문틀과 문짝을 연결하는 부분에는 까만 쇠로 만든 돌쩌귀’(방언 돌쪽)를 박아 여닫이가 쉽게 되어 있었다. 돌쩌귀의 암짝은 문설주에 수짝은 문틀에 박고 두 구멍을 일치시킨 후, 가운데 작은 장쇠를 끼어 문이 잘 여닫히도록 하였다. 아주 오래된 옛집은 대체로 방문 크기가 작아 출입할 때 허리를 많이 꾸부려야 했다. 다행이도 우리 집은 6,25사변 이후 새로 지은 집이라 문짝이 제법 커 그런 불편은 없었든 것 같다.


옛 목문은 대체로 연결 부분도 정확하지 않았고, 또 나무로 된 문틀 자체가 건조되면서 자연히 비뚤어져 문틀과 문짝이 잘 맞질 않았다. 문을 닫아도 항상 손가락 한둘이 들락거릴 정도의 틈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따듯한 봄이나 여름철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불어오면 방안은 외풍으로 선들선들하였고, 겨울에는 방안에 앉아 있어도 콧등이 시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틈새를 문풍지가 막아주어 견딜 만하였다.
그리고 그때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 여름철이 되어도 방마다 모기장을 사다 칠 돈이 없었다. 대부분 집에서는 문짝 상단 부분의 창호지를 떼 내고 모기장 쪼가리를 붙여 모기 침투를 겨우 막았다.

방문 창호지는 매년 추석 무렵에 새로 갈아붙였다. 그날은 방마다 달린 문짝을 모두 떼다가 양지바른 마당에 내놓고 물을 흠뻑 품어 묵은 창호지를 뜯어낸 다음, 밀가루 풀을 끓여 새 창호지로 갈아 붙였다. 어릴 때 아버지가 새 창호지를 바를 때마다 옆에서 거들며 유심히 보았다. 처음 몇 년간은 낡은 창호지를 떼 낸 다음, 문살에 풀칠을 하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발랐는데 붙인 창호지가 쭈글쭈글하여 별로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창호지 바르는 기술이 달라졌다. 문짝 크기에 맞게 창호지를 자른 다음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바른 후 문짝에 갖다 붙였다. 그렇게 하니까 문종이가 마르면서 팽팽해져 보기가 아주 좋았다. 문종이를 바른 다음, 문짝을 달고는 돌쪽 있는 연결 부분과 문짝 바깥 테두리에 여유 있게 문풍지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틀어진 목문의 틈새를 최종 보완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새 창호지로 문을 깨끗하게 바르고 나면 처음에는 깨끗하고, 구멍이 하나도 없어 보기가 참 좋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우리 형제 중에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게 문짝 곳곳에 구멍이 나 있고, 부모님은 범인을 색출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결국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 함께 꾸중을 들어야 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우리 집뿐만 아니다. 여러 형제가 있는 집이면 그중에 꼭 짓궂은 애가 구멍을 내거나 일상 중에 종이가 얇아 걸핏하면 구멍이 나기 때문이다. 집집을 다니다 보면 성한 문이 거의 없었다. 한참 지나고 나면 문짝마다 군데군데 뚫어진 구멍을 다른 종이로 때운 자국이 마치 떨어진 여자들의 치마에 다른 천을 대고 기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는 창호지를 새로 바를 때마다 문짝 중앙 한군데에 유리쪼가리를 붙여 방안에서 바깥 동정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거나 개 짖는 소리가 나면 우선 그 유리 부분을 통해 바깥 동정을 살펴본 후, 문을 열어주거나 대처를 한다. 나는 그렇게 발라놓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참 편리하다는 생각과 어른들의 작은 지혜에 감탄하기도 했다.추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겨울밤이면 문풍지가 바람에 떨면서 붕붕 윙윙 소리를 내어 울었고, 어린 우리 형제들은 컴컴한 호롱불 아래서 때 묻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서로 따듯한 구둘 막을 차지하려고 밀치며 승강이를 벌이기도 하였다. 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문틀과 목문이 그리운 겨울밤이면 함께 문풍지가 생각난다. 문풍지가 부웅붕 운다는 강소천의 ‘겨울밤’이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바람이 솨아솨아솨아 부는 밤/문풍지가 부웅붕 우는 밤/겨울밤 추운 밤 우리는 하룻가에 모여앉아/감자를 구워 먹으며 옛날 얘기를 합니다 언니는 호랑이 이야기/누나는 공주 이야기/나는 오늘 밤도 토끼 이야기 감자를 두 번씩이나 구워 먹고 나도/우리는 잠이 안 옵니다/겨울밤은 길고 깁니다 우리는 콩을 볶아 먹습니다/강냉이를 튀겨 먹습니다/그래도 겨울밤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불편하고 볼품이 없었지만, 사방이 흙벽으로 된 방에다가 문풍지가 자동 환기 조절을 해주었으니 아주 위생적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문풍지는 한겨울 추위에도 자기 몸을 움츠려가며 문틀과 문짝의 틈새에서 찬바람을 막아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 주면서도 아무 말 없이 부릉부릉 울기만 하였다. 삐걱거리는 목문과 문풍지가 그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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