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서울 천도(遷都)의 일화
수도서울 천도(遷都)의 일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3.08 19:2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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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이태조 원년(1371) 7월 16일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한 이성계는 개성에서 딴 곳으로 천도를 서둘렀다. 당시 명승이며 음양지리학에 밝은 무학대사에게 명하여 새 도읍지 선정을 의뢰 무학대사 일행은 충청도 계룡산 밑 신도터를 잡고 역사(力事)를 하다가 조운(漕運)이 멀다하여 포기하고 한양 땅을 접어들어 지금의 왕십리에 이르니 때마침 검은 소로 밭갈이하던 백발노인이 큰 소리로 “무학보다 더 미련한 소야 해는 지는데 언제 이 밭을 다 갈고 천리 길을 가겠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 곁을 지나던 무학대사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했다. 소보다도 못한 무학이란 비유에 그는 순간 화가 났고 한편 대사는 그 노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촌부에게로 다가가 정중하게 몸을 조아리며 인사드리고 무학을 잘 아시느냐 소보다 미련하다고 하시는데, 노인이 보아하니 대사는 왕의 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정하려고 터를 찾는 모양인데 천시(天時)가 가르치는 왕도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하오. 이곳에서 서쪽을 향하여 10리를 가면 대사가 가히 짐작할만한 곳에 이를 것이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동안에 검은 소와 백발노인은 어디론지 간 곳이 없고 숲 속뿐이었다. 노인이 정한 곳이 나타났으니 지금의 왕십리는 그 때 무학대사일행이 십리를 걸어갔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학과 정도전은 궁을 어느 방향으로 짓느냐는데 의견이 달라 결국 정도전의 의견인 남향으로 짓기로 했다.

이 논쟁으로 대세는 이미 정도전으로 기울어 졌던 것이다. 서울의 주산은 경복궁 북쪽에 있는 백악산이다. 도성의 청룡으로서는 웅자한 용이 머리를 들어 백악산을 감싸 호위하나 백호의 세만 못하여 약간 짧으면서 허하다하여 후에 사람의 힘으로 청룡의 허한 곳을 채우기 위해 동대문 밖에 옹성을 쌓고 동대문 헌판을 “흥인지문”이라 하여 현판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 고갯머리를 가로막게 하여 동쪽의 허한 곳을 막게 하기 위함이다. 인왕산은 도성의 백호로서 백악산을 호위하고 관악산은 도성의 조산이 된다. 서울의 외수 한강은 동쪽에서 발원 서쪽으로 흘러 중량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가니 수태극형과 같다.

태조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기고 난 후 무학대사의 말대로 이씨왕조는 28대에 그쳤는데 태종 이방원은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골육상쟁으로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세조는 단종을 밀어냈으며 수많은 신하를 죽였다 뿐만 아니라 태조 3년 7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천도한 후 500여년간 숱한 풍파를 만났으니 무학은 역시 도인(道人)이었나 보다 서울 도성을 남향으로 지어야만 변화무쌍하고 발전한다고 정도전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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