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 치마 동상과 표지석 세우자
행주 치마 동상과 표지석 세우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6.04.06 19:0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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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

 
1592년 임진년 10월 5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1차 전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대 혈전 이었다.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2차전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과 패전이었다.

금년은 임진왜란으로부터 423주년이 되는 해로 제 1차 진주성 전투의 공적은 누구에게 있으며 제 2차 전투의 희생의 대부분은 누구인가.

당연히 김시민, 고종후, 황진, 최경회, 김준민, 장윤 등과 제 장군들의 공적이 크고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경기도 행주산성에서의 전투와 승전의 공적은 권율(權慄) 장군에게 돌리면서 여성들의 행주치마가 큰 역할을 했음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진주성 1, 2차 전의 공적과 희생도 여성들에게도 돌릴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선조실록>등을 열람해 보면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엄청난 공격을 좌절시켰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4월이 되자 창렬사 제향이 있을 것이지만 조경남의 <난중잡록>제 3권 임진년 10월 기록에 의하면 ‘적들이 볼 때 군세가 왕성함을 보이게 하려는 작전의 일환으로 성내에서 전망이 좋은 곳에 용대기를 세우고 장막을 놓은 다음 성중의 사녀(士女)들과 노약자(老弱者)들을 전원 남장(男裝)을 시켜 장정처럼 보이게 했다’라고 기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1592년 10월조에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위에 감추었다’라는 대목에서도 여성의 몫을 표현했다.

여성들 거주지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토록 했고 장군 부인. 병사 부인. 현감부인. 판관부인. 훈도부인들이 지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기록에 의하면 적군이 성벽을 오를 때 돌을 굴러 내리고 뜨거운 물을 퍼붓는 일과 부상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일과 위로하는 일 등은 여성들의 몫이었고 돌을 운반하기 어려워 자연스럽게 행주치마. 인력거가 동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일간의 전투에서 남성위주의 공적에서 여성들의 공적도 크고 위대했음을 인정하고 선양할 필요가 있다.
임진.계사년의 공신들에게 벼슬을 추증할 때 부인들에게도 같은 직급을 내렸다. 그러므로 기념식과 추념식 때 여성의 역할과 공적을 선양해야 되고 당연히 여성들의 공적을 기리는 행주치마 동상과 기념탑. 표지석을 세워야 한다.

진주 대첩 1차 공적의 절반은 여성들에게 있고 제2차 진주성 희생의 절반은 여성들에게 있다. 오히려 더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인물만 공적이 있는 것처럼 비치는 일은 점차 사라져야 할 폐습이고 잘못된 일이다. 여성들의 쾌거를 기리기 위해 행주치마 동상을 세우고 기념 사업 및 표지석 건립을 추진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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