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시간 꿋꿋한 아름다움 인간의 욕심앞에 무너진 국보
천년의 시간 꿋꿋한 아름다움 인간의 욕심앞에 무너진 국보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05.23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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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백장암 삼층석탑

▲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
도굴꾼에 파손된 비운의 역사
통일신라 후기 흥덕왕때 세운 것
옛날 그 자리에다 오래전 복원
조형성 아름다워 국보로서 가치
천년의 시간…꿋꿋한 아름다움

 

▲30년전인 1980년 2월 첫날 이른 새벽, 서너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지리산 기슭 실상사 백장암 어둠 속을 뚫고 은밀히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어깨에 2m에서 4m길이의 소나무 각목 하나씩을 메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달동네 집을 강제 철거하는 난장꾼들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청부살인을 받은 사람들처럼 분위기가 무겁고 칙칙했다.
이들은 백장암 근처 앞까지 들어오더니 소리 없이 이동해 석탑부근에 찰싹 달라붙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행동을 개시했다. 석탑의 탑신 구멍에 4m짜리 각목을 꽂아 넣은 뒤 힘을 주었다. 그러나 석탑은 이들의 소원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들은 다시 한번 힘을 합해 낮은 소리로 ‘하나둘 셋’을 외친 뒤 힘을 주었다.
순간 석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백년간 백장암 앞마당을 지키고 서 있던 3층석탑이 문화재 도굴꾼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부랴부랴 후레쉬를 비추며 탑신을 뒤적이던 그들은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마치 빈지갑을 주운 사람처럼 뭐라 뭐라 씨부렁거리면서 쓰던 각목을 내팽개친 뒤 쫓기듯 백장암을 빠져 나갔다.
그들이 빠져 나간 다음 산허리에 위치한 백장암에는 정적이 흘렀고 10여 조각으로 부서져 꼬꾸라진 석탑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있었다.
이에 앞서 1972년 삼층석탑은 문화재관리국이 해체복원공사를 하던 도중 기술부족으로 무너뜨려 이미 7군데가 깨져 그동안 접착제로 붙여두었었다.
그들이 생각한 보물이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국보 제10호 백장암 삼층석탑은 이처럼 도굴꾼들에 의해 파손된 비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비가 내리는 주말 실상사 말사 백장암을 찾았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번지 지리산 줄기의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암자다.
실상사에서 인월 방향 3km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안내판을 따라 오른쪽 산으로 붙어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1km정도 고불고불 오르면 암자가 나온다.
백장암은 이달 초 대웅전 중창 불사를 했다. 아직 나무냄새가 가지 않은 건물 벽면에는 단청이 없고 검은 바탕에 금빛으로 새긴 대웅전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 우뚝 선 것이 1962년 12월 국보 제 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百丈庵 三層石塔)이다.

석탑은 통일신라 후기흥덕왕 때 세운 것으로 전체적인 조형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탑신에 새겨진 조각들이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높이 5m에 화강암 기단구조와 각 부분의 장식 조각을 특이한 양식으로 처리한 아름다운 이형 석탑이다.
눈에 확 띄는 것은 각층 탑신부에 돋을 새김한 조각들.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고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1층의 신장상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왕방울만한 눈, 섬세한 코와 입, 뚜렷한 손가락, 주름 잡힌 옷, 구름을 타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

2층의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은 기타와 비슷한 악기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에다 그 옆 한사람은 두 손으로 피리를 잡아 불고 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자유분방하게 새긴 조각이 당시 조각가의 마음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얼굴 형태는 1층 것과는 비교해 뭉툭하지만 고색창연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야말로 딱딱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자유롭게 조각했다는 느낌이다.

국보로서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조각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데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한국탑파 중 희귀한 공예품의 하나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함께 도굴됐던 석등은 탑 바로 옆에 있으며 화강암으로 된 높이 1m27의 소형 석등이다. 하대석과 상대석은 발형연화문을 새기고 옆에 는 난간형을 새겨 둘렀다. 그 위에 4개의 투창이 있는 8각형 화시석이 놓여있다.
특히 석등과 석탑에는 같은 시대에 제작됐음을 입증하는 특이한 디자인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 탑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 욕심에 의한 수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형성이 아름다워 국보로서 가치를 느끼게 했던 전체적인 모습은 안타깝게도 도굴과 파손으로 이미 원형을 잃어버렸다. 지붕의 각 모서리는 떨어져 날아가 버렸고, 각 층사이의 틈이 많이 벌어져 치밀함은 예전만 못하다.
도굴사건 후에 복원을 해서 세웠다지만 석탑은 허투루 봐도 1층부터 3층까지 삐뚤 빼뚤한 모습이 확연하다. 석탑의 기단석과 옥신석 1층 옥개석만 그대로 있고 복발보개 수연 등 탑의 상층부는 어디 한곳 성한 데가 없다.
비교적 온전한 것은 3층이지만 그래도 국보의 품격이라기엔 상처가 너무 많았다.
자리를 대웅전 오른쪽 모퉁이로 옮겨 바라본 석탑의 모습은 삐뚤어짐 현상이 너무 심해 복원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
결과적으로 국보 10호 삼층석탑은 조각 부분을 제외하고는 탑의 전체적인 현재 모습은 상처투성이에다 조형성도 크게 잃어버린 셈이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석탑 앞에서 느끼는 감상이 허허롭다.
깨지고 부서져버린 석탑처럼, 꼭 그만큼 삐뚤어져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본다. 물질 만능이 판을 치는 세상, 마치 탑은 인간의 욕심과 잔인함을 조로하듯 내려 보는 듯하다.
인간은 잔인하다할 수밖에 없다.
천년의 시간을 접이부채처럼 접어서 홀연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선조들의 고귀한 유산, 현세의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문화재를 단 하루아침에 뭉개버린 뒤 주저앉히고야 말았다.
석탑은 숱한 비바람의 세월과 지각의 변동, 전란의 화마 속에서도 천년의 시간동안 꿋꿋이 아름다움을 유지해 왔건만 허상을 쫓는 사람들의 욕심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백장암 뜰 앞에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린다. 빗줄기가 굵어져 3층 석탑 지붕 아래로 스며 흐르는 빗물 형상이 어쩌면 탑이 흘리는 눈물처럼도 보인다.
어찌 할 것인가. 황망함을,
그러나 어쩌랴, 먼 미래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지 않겠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석탑 뒤로 대웅전이 새로 건립돼 문화재에 대한 관리가 잘 될 것이라는 위안이 있기 때문이다.
합장(合掌) 한번 올리고 돌아 섰다.
백장암 운산스님은 “국보인 삼층석탑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도굴될 당시에 있었던 옛날 그 자리에다 오래전 복원을 했다.
도굴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석탑에서 당 시대의 악기와 풍습 등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돋을새김을 한 보살상 신장상 천인상의 모습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곧 부처님 오신 날이다. 사부대중이나 일반인들도 많이 찾아와 국보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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