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당신은 어느 계절이 좋은가요?
도민칼럼-당신은 어느 계절이 좋은가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08.21 18: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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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수필가

이호석/합천수필가-당신은 어느 계절이 좋은가요?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어 너무 좋다. 자연은 계절마다 삼천리강산의 광활한 무대를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장식하고, 그 무대 위의 사람들은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계절마다 개성 따라 각양각색의 의상으로 꾸미고, 제각각의 역할을 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우리는 흔히 친숙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이 좋은가? 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그러면 간혹 여름과 겨울이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봄, 가을이 좋다고 한다. 여름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유가 많아 외국으로 휴가를 다녀오거나 국내 피서지 등에서 더욱 편히 보낼 수 있는 사람들, 그렇지 않으면 노출의 계절을 맞아 팔등신의 몸매를 한껏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겨울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스키 타기나 빙판 오르기, 겨울 등산 등 특별히 겨울철 취미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 아니면 값비싼 겨울옷을 치렁치렁 걸치고 돈 자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선천적으로 여름, 겨울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과드린다.

그런데 나는 ‘어느 계절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이는 평소 소신 없는 나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질문을 받고 사계절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두가 나름대로 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계절이 다 좋은 것은 내가 농촌에서 태어나 자연에 묻혀 살아오는 동안 모든 희로애락을 연연의 사계절과 함께하였기 때문이다.

봄은 따뜻한 봄바람이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며 만물을 소생시키고 온갖 아름다운 꽃들을 피운다. 나는 그 들판에서 또래들과 소를 먹이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소먹이고 소 풀(꼴)을 베다 나르는 일, 때로는 부모님을 따라 논밭에 나가 잡초를 메야하는 일 등 모두 힘들고 귀찮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소꿉친구들과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삐삐(빌기)를 뽑고, 언덕바지 찔레 덤불 밑에 살이 통통하게 찐 찔레 순을 꺾어 먹던 일, 또 앞·뒷산을 내 집 마당처럼 돌아다니며 참꽃을 꺾고, 칡을 캐 입술이 새까맣도록 먹던 일 등은 작은 즐거움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농촌의 아이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자연에서 간식거리를 찾아 헤매었던 것이란 생각으로 마음 한편이 아리다.

여름은 우리를 아프리카 깜둥이로 만들었다. 틈만 나면 마을 앞 황강으로 달려 나갔다. 그 넓은 백사장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천혜의 운동장이었다. 하얀 모래밭과 시원한 강물을 번 채로 들락거리며 피리와 모래무지를 잡기도 했다. 또 황강은 저녁이면 온 마을 남녀노소가 유유상종으로 모여 목욕을 하는 노천 공동탕이었고, 우리 악동들은 하루 저녁도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었다. 가끔은 마을 사람들과 멀찍이 진을 치고, 낮에 눈여겨 봐두었던 인근의 참외, 수박밭을 습격하여 서리했다. 또 여름철 하면, 새까만 꽁보리밥을 시원한 샘물에 말아 생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었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성장하여서는 초여름, 밀 보리타작이 가장 힘들었다. 밭에서 말린 밀 보리를 모두 집으로 지게로 저다 날라 도리깨 타작을 해야 했다. 땀범벅이 된 온몸에 보리 가시랭이가 달라붙어 괴로웠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근지러워 지는 것 같다.

가을은 온 산야가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다. 마을 곳곳의 감나무에는 여름내 푸른 잎 속에 숨어 있던 누런 감들이 주렁주렁 민낯을 드러내고, 들판에는 황금빛 벼들이 춤을 춘다. 또 추석 무렵이면 콩밭에 나가 누런 콩잎을 따고 풀을 뜯어말려 곧 들이닥칠 겨울철 소먹이거리를 장만해야 했다. 당시 농촌에서는 얼띤 사람보다 소가 더 대접을 받았다. 소는 농가의 재산 목록 1호이자 가장 큰 일꾼이었다. 오곡백과가 익어 마음은 풍요롭지만, 그것을 추수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또 가을걷이가 끝나면 여름내 집안에 장만해 놓았던 거름을 논밭에 저다 내어 보리갈이를 해야 하는데 이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겨울은 유년 시절에는 그런대로 즐거웠다. 얇고 초라한 옷으로 추위에 떨기도 하였지만, 틈틈이 썰매도 타고, 연도 날리고, 딱지도 치며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 귀찮았던 소먹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할 일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야 했고, 어른들이 초가지붕을 새로 이기 위해 마름을 엮을 때는 추운 날씨에 손을 호호 불며 옆에서 짚을 떼서 아사줘야 했으며, 또 때로는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하려 다녀야 했다.

이렇게 어릴 적 사계절은 모두 나에게 작은 즐거움도 주었지만, 너무 많은 고생을 안겨줘 끔찍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고생들이 어느 것 하나 버리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선뜻 어느 한 계절만 좋다고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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