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충주 탄금대(彈琴臺)
진주성-충주 탄금대(彈琴臺)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0.31 19:01
  •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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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충주 탄금대(彈琴臺)


충북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고적지로 대문산(大門山)을 중심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수려한 경관과 유서깊은 고적지로 명승42호(2008년7월9일)로 지정. 가야국의 우륵(于勒)이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에게 명성이 알려져 하림궁(河臨宮)에서 새 곡을 지어 연주하니 왕이 감동하여 충주(忠州)에 살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를 보호하던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蔓德)에게는 춤을 가르치며 여가 있을 때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며 살았다.

탄금대라는 명칭도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탄금대 신소설이 있다. 1912년 이해조의 작품으로 밀양읍에 사는 만득이 집에 불이났다. 이는 재산을 탐낸 비부(婢夫) 주오위장이 방화한 것이었다. 만득은 전답문서를 가지고 가까스로 살아나 양산통도사의 주승 운유암의 주지 가르침을 받는다. 몇해 후 운유암은 만득의 앞날에 대한 예언을 말하고 절을 떠난다. 그 후 만득은 그금도에 가서 어느 부잣집 사위가 되고 장인은 주오위장의 아우였다. 만득의 정체를 안 그는 만득을 해치려고 하였으나 현숙한 부인이 만득을 위하여 대신 죽는다. 그 후 여러곳을 전전하다 탄금대를 찾아가 체의관의 딸과 혼인한 뒤 원수를 갚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탄금가는 조선시대 가사로 “늙고 또 죽는 것은 누구나 면치 못하는 것이니 부귀공명을 헌신짝같이 내던지고 한평생을 놀아 보자”는 것이다.

탄금대싸움은 임진왜란때 신입(申砬)장군이 충주를 방어하다 패한 쌍움 1592년(선조25) 4월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맹렬한 기세로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명장 신입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그는 험악한 조령의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무찌르려 하였으나 24일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고니시(小西行長)에게 패하여 돌아오자 충주로 후퇴 26일 충주 북서 4Km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고니시를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패하여 신입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신입의 배수진에 관해서는 후일 전략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 명장 이여송도 조령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인데 배수진을 이용하는 무모한 행동을 취했다고 탄식하였다. 일설에 그 이유가 적은 주로 보병이고 조선군은 기병이 많았으므로 전술상 험준한 산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택한 것이라고 하나 실상은 이때 적은 이미 조령을 넘은 후였던 것이다. 신입의 패보가 서울에 전해지자 민심은 극도로 혼란해지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탄금대라는 명칭은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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