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승을 뛰어넘자
칼럼-스승을 뛰어넘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7.11.07 18:4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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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산스님 금인산 여래암 주지

범산스님 금인산 여래암 주지-스승을 뛰어넘자


인간은 행위를 통해서만 실재와 접촉할 수 있다. 아무리 옳고, 훌륭한 생각이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생각은 무한대로 이동하고 시공을 초월하기에 생각보다 빠른 것이 없다. 그러나 잠 잘 때만은 깊은 휴식으로서 사고가 완전히 멈추게 된다.

마삼근(麻三斤)이야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 스님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묻자, “마삼근” 이라고 답했다. 옛날에 승복한 벌을 만드는 데는 마삼근이 들어 갔다한다.

그러니까 승복을 입은 네가 부처라는 답이다. 이 말속에는 승복을 승복으로만 보지 마라는 뜻도 있고, 또 스님이 스님으로만 머물러 있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뜻도 들어있다.

왜냐하면 승복을 풀면 실이 되고, 그 실로는 다른 옷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잠깐,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 단하스님이 목불(木佛)을 태운 이야기다. 엄동설한에 단하스님이 추위를 견디다 못해 법당의 목불을 쪼개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다른 스님이 이런 경천동지할 만행을 보고 노발대발하며 이게 무슨 짓이냐며 대들었다.

단하스님은 태연스레 “목불에 사리가 있는지 볼려구요”라고 답한다. 흥분한 스님께서 버럭 화를 내며 “나무에 어떻게 사리가 들어 있겠는가!” 말하는 순간, ‘아! 내가 지금까지 목불에 너무 집착해 있었구나!’ 하며 크게 깨달아버린 것이다. 어떤 규칙과 관행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는 삶을 살지 말자. 기존의 통념과 틀을 가볍게 부셔버릴 수도 있어야한다.

지금까지의 격식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간결하고 간단하게 어떤 것에도 막힘이 없는 무애(無碍) 자재(自在)하고 자유롭게 새로운 규칙을 창조할 줄도 알자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나그네 아닌 주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마삼근으로 꼭 승복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불을 쪼개면 땔감도 될 수 있고, 그걸로 그릇도 만들 수가 있다.

엄동설한에 땔감하나 없는 스님이 목불을 붙들고 얼어 죽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쪼개서 불을 집혀 살아나는 것이 맞는가. 어떤 삶이 과연 주인공으로 사는 삶인가?

수행자는 걸림 없이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어디엔가 얽매여 살면 진보가 없다.

마음에 접착제처럼 붙어 있는 것이 ‘집착’이다. ‘집착’을 훌훌 벗어던져야한다.

깨달음이란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여여(如如) 또는 타타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하였다.

이 말은 자신의 스승을 뛰어 넘으라는 가르침이다. 만약 스승을 뛰어 넘지 못하고 항상 스승에게만 매달려 있으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기존의 전통방식이나 규칙의 노예 아닌 주인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그래서 수행자는 어린이의 친구도 되어줄 수 있어야 하고, 시련의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그 시련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 줄줄도 알아야한다.

그러나 잘난척하는 사람에게는 죽비를 휘둘러 사자처럼 무서운 스승이 되어 줘야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동등한 수평성으로 보아야한다. 지금 죽을 만큼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그것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며, 내일이면 나 또한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월감 갖지 말고 살아가자.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처염상정(處染常淨)인 것은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서도, 결코 물들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탁악세에 몸담고 있지만 그런 것에 물들지 않고 슬픔과 고통, 번뇌가 가득한 세상에도 물들지 않아야하며 맑고 향기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한다. 현인들은 세상을 몰라서 묻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조용히 묻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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