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가장 치욕스런 을미(乙未)년
진주성-가장 치욕스런 을미(乙未)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8.05.01 18:2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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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가장 치욕스런 을미(乙未)년

1895년(고종32년) 민비(명성왕후) 일파의 친로적 세력을 없애고 자기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일본공사 미우라 등이 일으킨 변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조선내정을 강압적으로 간섭하던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하자 더욱 노골적으로 그들의 침략성을 들어내어 일본공사 이노우애는 대원군을 몰아내고 박영효(1861-1939), 김홍집(1842-1896)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조직하고 그들의 기반을 닦았다.

홍범14조 중 왕비의 국정간여를 금지하는 조항마저 삭제했으나 민비(閔妃 1851-1895)등 이에 반항 10월 7일 미우라는 대원군을 받들고 8일 새벽 훈련대 장병 등이 경복궁에 침입 호위병을 죽이고 궁내부대신 이경식 등 죽인 후 옥호루에 있는 민비를 살해한 다음 시체에 석유를 뿌리고 불살라 뒷산에 묻었다.

그들은 임금에게 강요 유길준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김홍집내각을 수립했다. 우리근대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날이다.

1895년 조선이 주권을 빼앗기고 일본 식민지로 떨어진 날이다.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黃炫 시인 1855-1910)은 절명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인간세상에 지식인 노릇하기가 어렵기만 하구나”

우리가 양력 1월1일을 새해 시작으로 삼은 것은 을미사변 후 일제 강요에 의해서였다. 이전까지 새해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 시작했다. 현대식 년도 개념도 없었고 일요일등 요일 개념도 없었다. 조선이 근대적 국가로 단발령 양력 도입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이런 근대적 개혁이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우리뜻이 아니라 외세강요에 의한 굴절의 씨앗이었다. 어떤이는 8월 15일을 도둑같이 찾아 온 해방이라 했다. 준비없이 갑자기 찾아온 해방이라고 했다. 새 내각에서는 모든 방면에 개혁의 손을 대어 음력폐지 종두법시행 우편의 개시 건양(建陽) 연호사용 단발령 시행 등 급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참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으며 결국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를 마련 일본의 개혁에 타격을 주게 되었고 한때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다.

어떤이는 8.15를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라 했다. 준비없이 갑자기 광복이 왔다는 애기다. 연합국의 전승의 선물이다. 그렇게 맞은 해방이 민족의 힘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탓에 분단을 막을수 없었다. 후삼국 시대 이래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대립하는 세월이 70년째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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