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억해야 할 또 하루의 역사, 2·8 독립선언
기고-기억해야 할 또 하루의 역사, 2·8 독립선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2.13 19:01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용기/경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
 

박용기/경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기억해야 할 또 하루의 역사, 2·8 독립선언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총과 칼을 앞세웠던 잔혹한 무단통치에도 굴하지 않았던 우리민족은 거리로 나가 한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주변의 식민지 국가들도 민족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국제적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3·1운동의 의의와 중요성은 온 국민에게 인정받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놓이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 3·1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의 단계로 묘사되어 간략한 설명만으로 언급을 마치는 사건들도 있다. 2·8 독립선언이 그 사건들 중 하나이며 우리가 오늘날 되새겨야 할 역사속의 하루이기도 하다.

2·8독립선언은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재일 한인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 8일 동경 한복판에서 조국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사건이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독립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신학문을 배워야 했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 유학생들은 자치단체를 조직하고 졸업생축하회·신입생환영회 등을 표면으로 내세워가며 회원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재일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 작성과 낭독으로 국내외의 한인 동포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독려하고, 더 나은 독립의 방향을 고민하며 2·8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재일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낭독했다는 간단한 설명만으로 2·8독립선언서의 의의를 온전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민족자결주의로 일컬어지는 ‘평화원칙 14개 조항‘은 파리평화회의를 거치면서 승전국의 이해가 반영되어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는 기준에 불과했으며,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던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이 시기의 재일유학생들은 자치단체의 운영으로 다져온 결속력을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열망을 분출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 시기를 들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라고 결의를 다졌고 그 구체적 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2·8독립선언서인 것이다.

“오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오족의 자유를 추구할지나 만일 차로써 성공치 못하면 오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야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열혈을 유할지니…, 오족은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하리라”

2·8독립선언에 담긴 기백과 결기는 국내로 전해져 민족대표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을 뿐만 아니라 3·1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할 때 참고가 되었다.

동트기 전의 어둠이 가장 짙은 어둠인 법이고, 첫 닭의 울음은 그런 어둠이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이다. 우리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힘으로 증명하던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서 울려 퍼진 2·8의 외침과 독립선언을 기억하고 되새겨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