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 민족의 독립을 외치다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 민족의 독립을 외치다
  • 윤다정기자
  • 승인 2019.02.27 19:38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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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과기대, 진주 3·1운동 주도한 장두관 등 다수 독립운동가 배출
▲ 좌측부터 독립운동가 강상호, 설창수, 장두관.

나라가 어려울 때면 학생들이 일어나 민족의 독립을 외쳤다.

진주 독립의 중심에는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졸업생이 있었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이하 경남과기대)는 1910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세워진 민족대학으로, 109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진주지역 항일운동사에는 유난히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기대) 출신 이름이 많다. 설창수, 장두관 등 항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동가를 비롯해 1회 졸업생인 강상호, 김종범, 유영준, 김정두, 오주환, 강치렬, 손재진 등 항일 애국지사들. 이들은 후배들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이자 진주의 자랑이다.

◆강상호(1887년 4월 12일~1957년 11월 12일) - 1912년 제1회 졸업

강상호 선생은 형평운동의 선구자이자 항일 운동가였다.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다. 백정은 도축업, 제혁(製革), 유세공(柳細工) 등에 종사하는 천민층으로 갑오개혁 이후 법제상으로는 해방됐으나 일제는 관공서 문서에 반드시 신분을 기록하도록 했다. 일제의 이러한 처사를 철회하고자 강상호, 이학찬, 신현수, 장지필 등은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은 물론 다른 사회운동단체 등과 제휴해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담당했다. 강상호 선생은 최근에 국채보상운동의 경남지역 선구자로 밝혀지면서 숨은 업적이 더 드러나기도 했다.

강상호 선생은 1907년 3월 강주식, 안헌과 함께 국채보상회 경남회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7월에는 김재용, 서강돈 등과 함께 학생 수천 명을 회집해 항일 연설을 했다. 당시 23세의 나이로 공립 진주실업학교 1학년 학생 신분이었다. 1912년 학교를 졸업한 뒤로 7년 후에는 진주 3·1운동 때 시위를 주도하다 검거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0년 동아일보 진주 초대 지국장을 지냈으며, 1922년 현 진주여고의 효시인 일신여고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교육문화운동의 선구자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설창수(1916년 11월 6일~1998년 6월 28일) - 1935년 제21회 졸업

파성 설창수는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항일투사였다. 진주 개천예술제의 산파이기도 하다. 진주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TK사단 사건으로 기소유예 됐으며, 도쿄·교토 등지에서의 항일 투쟁으로 검거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42년 6월 부산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1944년 3월 4일까지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진주로 돌아온 뒤 고문 후유증과 감옥에서 생긴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개천예술제를 창시했다. 1984년에 그의 작품을 모은 ‘설창수 전집’(6권)이 간행됐고, 1990년에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파성문학상이 제정됐다.

◆장두관(1900년 3월 1일~1958년 10월 10일) - 1919년 8회 졸업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장두관은 졸업반(8회)이었다. 강직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무인의 기질이 남달랐던 그는 서울의 대규모 시위에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에서도 학생 조직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마침 진주 의거 주역인 박진환은 장두관 친구인 박영환의 형이었다. 박진환의 지도에 따라 그는 학생들을 광범위하게 포섭하며 거사 준비에 동참했다. 마침내 3월 18일 정오에 진주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달려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두관은 두 번째 집결지인 재판소 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나누어주며 시민들을 지휘했다.

최선봉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도청으로 향하던 장두관은 경찰에 체포돼 6개월 징역형을 받고 복역했다. 만기 출옥 후 요시찰 인물이 된 그는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로 결심, 1919년 10월 만주로 떠났다.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벌판을 누리며 독립 전선에서 청춘을 불살랐다. 1923년에는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세운 고려혁명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연대 대대장으로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1924년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을 마련하려다 체포돼 다시 1년 8개월의 형을 살았다. 도산 안창호의 가르침을 따르는 진주무직회(晉州無職會)를 조직하고 자유노동대 등의 기관을 설립해 실업 청년들을 선도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신간회 진주지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다 광복이 되자 육군 창설에 참여해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1958년 지병으로 타계하자 정부는 대한민국 상무회장으로 그 충혼을 위로했다. 1977년에는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진농 2학년들의 천장절 의거 미수 사건

▲ 1910년 4월 6일자 ‘관보’ 공립 진주실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가 1910년 4월 4일 설립인가를 받았음을 알리고 있다.

1919년 전국을 휩쓴 3·1운동 이후에도 민족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었다.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은밀히 준비해나갔다.

1920년 8월 30일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의 생일)인 31일에 시위를 하려던 계획이 발각된 것이다. 만세운동의 장소는 진주공원, 진주공립농업학교 앞, 재판소 앞 등 3곳이었다. 기숙사에서 학교의 등사판(인쇄기)으로 선언서 300장을 인쇄했고 제1 보통학교, 제2 보통학교, 광림학교, 기독청년회, 청년친목회 등 여러 곳에 통지를 하는 등 거사 준비를 하다가 하루 전날 모두 72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태극기, 손깃발, 격문 등이 증거물로 압수됐다.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 50명, 제1 보통학교 학생 3명, 제2 보통학교 학생 1명, 광림학교 학생 1명, 기타 15명이 검거돼 주모자로 분류된 15명은 검사국으로 보내지고 나머지 57명은 석방됐다. 문위동(당시 18세), 신영안(당시 22세), 김익상(당시 20세) 등 3명이 주모자로 몰렸는데 모두 진주공립농업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문위동, 신영안, 김익상은 2개월여의 심문과정을 거쳐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들은 당시에 받지 못했던 졸업장을 해방 후에 받았다.
 

▲ 진주공립농업학교(경남과기대)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다룬 기사(조선일보 1927년 6월 8일)

◆동맹 휴학과 진일보한 항일 연맹 휴학

1927년에는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저항하는 동맹 휴학 사건이 일어난다. 2학년 학급 담임인 일본인 타카기사 치로 교사의 언행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한국인을 비웃고 모욕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았고 학생들을 노예 대하듯 했다. 수업에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내 목이 떨어져도 조선은 독립하지 못한다”는 등의 망언을 참다못한 2학년(17회) 학생들은 6월 3일에 교장실을 찾아가 항의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5일 뒤인 6월 8일 학교 당국은 주동자로 지목된 6명을 퇴학시키고, 또 다른 6명에게는 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 사태를 보고 졸업생과 학부형들이 조정 방안을 미련하고 나섰다. 학생들도 대표를 뽑아 이마무라 다다오 교장을 찾아갔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퇴학생들의 처벌 수위를 무기정학으로 낮추겠다는 약속을 받고 6월 12일부터 등교했다.

1928년 7월에는 주목할 만한 학생운동의 한 형태로 평가되는 연맹 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진주공립농업학교가 연대해 휴학을 단행한 것이다. 일제에 대한 항쟁을 각 단위 학교에서 분산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항쟁 대상에 대해 공동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견해가 대두됐다.

진주공립농업학교와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는 동시에 동일한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항일 연맹 휴학에 돌입했다. 7월 6일 오전 8시를 기하여 두 학교는 연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1. 조일공학제(朝日共學制)를 폐지하라.
2. 노예적 교육을 철폐하라.
3. 조선어 시간을 연장하라.
4. 조선역사 및 조선어를 교수하라.
5. 교내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

이러한 요구 조건을 살펴보면 교내 문제보다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학원 투쟁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경찰은 두 학교에서 각 한 명씩을 주모자로 검거했다.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 등은 모두 퇴학서를 제출하고 저항 의사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학부형회는 7월 7일 긴급회의를 열고 경찰과 교섭해 두 학생을 석방했다.

두 학교의 교장은 경남도청을 다녀와서 직원회, 학부형회를 통해 학무국(각 학교와 이국 유학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의 뜻이라면서 “이번 맹휴의 요구 조건은 학생의 요구가 아닌 동시에 학생운동이 아닌 정치적 운동이고, 치안유지법에 저촉되는 것이므로 폐교를 할 것이지만, 특별히 무기휴교를 명령하더라”는 점을 통보했다. 또한 “학교로서도 단호한 조치를 할 것이나 이 사건이 전국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 무기정학을 지킨다”는 것도 아울러 통보했다.

그러나 학교 당국자들은 7월 14일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 15명,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10명의 학생을 퇴학시켰다. 한편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는 7월 19일 밤 10시경에 방화 사건이 터졌다. 경찰 조사 결과 방화자로 퇴학생인 정만기, 홍문표 등 3명이 검거됐다가 7월 22일 일단 석방됐다. 이런 와중에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는 교장과 학부형 측의 교섭 결과에 따라 7월 22일까지 등교하라는 연락을 취했으나 두 학교의 퇴학생은 47명으로 불어나고 무기정학은 350명에 달했다. 9월 1일경 무기정학 학생들의 징계가 해제됨으로써 진주 지방 학생의 연맹 휴학 사건은 일단락됐다.

1920년 항일 의거 미수 사건을 비롯해 1927년 2학년 동맹 휴학 사건, 1928년 연맹 휴학사건 등 항일 투쟁이 이어지면서 진주공립농업학교는 항일의식이 강한 학교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희생자들도 많았다. 윤다정기자

자료제공/경남과기대(진농·진산대 100년사 ‘역사편’)

▲ 경남과기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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