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항일 저항시의 전언(傳言)
시론-항일 저항시의 전언(傳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3.10 19:2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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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항일 저항시의 전언(傳言)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우리에게 익숙한 이육사의 ‘광야’ 마지막 구절이다.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절, 엄동설한에 봄을 알리는 한 줄기 매향(梅香)은 아득히 멀기만 한데, 시인은 거기서 조국 광복을 기구(祈求)하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다. 천고의 세월을 내다보며 꿈결 같은 예지력으로 기다리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곧 광복의 날에 새롭게 일어서는 민족혼의 구체적 형상이다. 현실은 어둡고 막막한데, 일신의 안일과 평안을 방기(放棄)해버린 시인은 가능성의 희망보다 당위성의 의지에 힘입어 ‘그날’을 예고한다.

이육사의 ‘그날’은 심훈이 「그날이 오면」에서 절규하듯 노래한, 바로 그 ‘그날’이기도 하다. 다음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자.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가며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마지막 구절이다.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는 것은, 그 이름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는 물리적 억압을 상징한다.

마침내 봄날이 도래하여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날에의 소망은 앞서 살펴본 ‘그날’과 동일하다.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여린 감성의 서정시인은, 철혈의 가슴을 가진 투사에 못지않은 민족의식을 환기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세 시인 이외에 항일 저항시를 쓴 시인이 또 누가 있을까. 승려이자 민족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이 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가 있고, ‘벌(罰)’을 통해 서대문형무소를 그렸던 김광섭이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홍사용이 그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더 찾아보기 어렵다. 저항시의 수준에 앞서 그 희소성을 더 유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항일저항시집을 꾸리는 이들은 하 답답하여 여기에 김소월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의 ‘옷과 밥과 자유’ 같은 시에 일말의 저항적 요소가 보이기는 하나, 본격적인 저항시라 지칭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상실과 말소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 고유의 민족어와 음률을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풀어낸 소월의 시는 구구절절 절창에 이른다. 언어가 곧 민족정신을 담는 그릇이요 그 현양(顯揚)의 가장 탁월한 방안이라 할 때, 한국 시사(詩史)에서 소월을 건너 뛸 일은 없다. ‘진달래 꽃’이나 ‘산유화’ 같은 시들은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한 구석이 깊은 감회에 젖는다. 그의 시어 하나하나가 이토록 심금을 울리는 명편이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인 저항시의 명호를 내걸 수는 없는 터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항일 저항시에 대한 인식과 기림을 새롭게 하는 일이 절실하다. 동시에 조국의 독립에 운명을 걸고 자신을 희생한 이들의 고귀한 정신을 다시 되돌아보고, 그 역사적 교훈을 이어갈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재정립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스페인 태생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언표(言表)인데, 윈스턴 처칠이나 단재 신채호도 이와 유사한 언급을 했다. 일제의 총검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선진들의 참상을 생각하면, 오늘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는 참으로 모질고 후안무치하기까지 하다. 국제정세와 상호협력의 이름으로 저들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통한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육사나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이 절박하게 그것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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