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진주성-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25 15:2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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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崔瑩, 1316-1388)은 고려말기의 명장 무인으로 여러번 왜구를 토벌하고 공을 세웠으며 1352년 9월에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자 안우 최원 등과 같이 그 일당을 죽여 호군으로서 출세하게 되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산 사람이 바로 최영 장군이다. 그는 고려의 최고 관직인 문화시중까지 올랐으면서도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고려 말은 홍건적과 왜구가 침입하고 중국에서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나라 안팎이 혼란하여 왕권마저 흔들리던 시기였다. 체격이 좋고 용감했던 최영 장군은 왜구와 홍건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워 우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정몽주, 이성계, 정도전 등 고려를 이끌어 왔지만 서로 생각이 달라 결국 요동정벌을 계기로 갈라섰다. 명나라가 고려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최영장군은 이 기회에 명나라의 요동을 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자고 주장하지만 요동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우왕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전쟁터에 나간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라는 섬에서 군사를 뒤돌렸다. 이 사건이 조선 건국의 발판이 된 ‘위화도 회군(1388)’이다. 개성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키자 요동정벌을 위해 많은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준 우왕과 최영장군은 이를 막을 도리가 없자 이성계에 의해 유배를 떠난 최영 장군은 결국 1388년에 처형당하고 말았다. 죄목은 ‘무리하게 요동정벌을 하려고 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며 권세를 탐한 죄’였다. 평생 나라를 위해 강직하게 살아온 그는 자신의 죄명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죄 없음은 하늘이 알고 있다. 내 평생 탐욕을 가졌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최영장군의 묘에는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600여년이 지난 지금은 풀이 무성하다고 전하고 있다.

최영 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에 있다.

최영 장군묘를 찾아가는 길목에 아주 큰 묘역이 있어서 헷갈리기 쉬운데 그곳은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이자 이성계의 손자인 성녕대군의 묘이다.

성녕대군은 우리가 잘 아는 세종대왕의 동생으로 14세 어린나이에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최영장군 묘는 이곳에서부터 마을길을 지나 걷기 좋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나온다. 평생 황금보기를 돌같이 여긴 장군의 성품처럼 참 소박한 모습이다. 아버지와의 묘와 상하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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