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환갑에 일러스트레이터
아침을 열며-환갑에 일러스트레이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21 15:4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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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환갑에 일러스트레이터

칠순을 넘긴 지인이 고민이 있었다. 문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학자인데 학문적인 고민이 생긴 것이다. 천성이 부지런한 지인은 늙으막에 한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정말이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따라서 성과물도 어마어마하다. 문제는 그걸 다 출판을 해야 제격인데 요즘 같이 출판 불황에 아무리 지인의 고명함이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좀 더 재미있는 한자공부를 연구하다 카툰을 곁들이게 됐고 그걸 또 다른 지인이 그리기는 했는데 책으로 출간하자면 일러스트 작업을 해야 했고, 할 사람이 마땅찮았다. 그 작업만 되면 지인의 고민은 해결인데.

고민을 하는 지인을 보는 내 마음이 심히 쨘했다. 지인의 한문관련 그 정성이 알알이 박힌 원고를 보면 더 안타깝다. 저 정도되면 나라에서 교육차원에서 마음것 출간하게 해주어야 된다라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그런 원고를 여기저기 출간의뢰를 하고 거절을 당한다. 나 역시 무명 작가로서 출간의뢰를 하기 위해 출판사를 전전한 서러운 경험이 있다. 오죽하면 스스로 출판사를 개업했을까! 덕분에 내 책은 물론이고 남편과 아들의 책까지 끊임없이 기획이 이어지고 원고가 꾸준히 생산되고 착착 책으로 출간을 할 수 있다. 하다보니 일러스트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자면 원래 그리는 쪽에 재능이 도드라졌었는데 스스로 노력해서 결실을 보는 쪽이 매력이 있어 나는 애써 문학 중에서도 소설을 선택했고 지금껏 후회없다. 워낙에 오지랍이 넓은 나는 지인의 고민을 어느새 내 고민으로 마음을 모았다. 일러스트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컴퓨터란 사람을 편리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분명히 편리할 거야. 사람들이 아무리 일러스트 작업이 어렵다고 해도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격려하며 덜컥 내가 해보겠다고 거의 승락을 해버렸다. 덜컥덜컥, 덜컥덕 말이다.

분명히 무모한 승락이기는 했지만 믿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바로 명문대(?) 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이 그 믿는 구석이었다. "안 돼요. 엄마가 그걸 한다는 건 나에게 배우겠다는 건데 남 못해!" 자기가 믿는 구석이라는 걸 말 안 해도 이미 알아차린 아들이 거칠게 항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은 요즘 새로 개업한 북카페로 그야말로 눈코뜰 새가 없다. 순하고 귀한 아들의 눈치를 사알살 살피며 히죽히죽 웃을 수밖에. "나 이래뵈도 한글은 잘 알잖아? 일러스트 왕초보를 위한 책 같은 게 없을까? 그러면 아들이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박사님 불싸하시잖아?"

아들은 당장 인터넷으로 안내책을 구입해주었다. 책이 도착하자 나는 당장 읽고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하고 고민됐던지 나는 하루 밤에 책을 다 읽었다. 백문의불여일견, 일러스트용 관련 기기를 구입하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순하고 착한 아들도 적극적으로 컴퓨터 작동법을 알으켜주었다. 첫날, 색칠공부를 한 결과물을 보고 아들은 우와~ 괜찮네, 칭찬 해주었다. 이에 힘을 입어 안내책에 나온 강아지를 그렸다. 아들이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이 그렇게 소리내어 웃는 건 모처럼 봤다. 아니, 처음인 것 같았다. 창피하지만 함께 웃을 수밖에.

토요일, 초저녁에 잠을 좀 자두었다. 밤을 새서라도 작업을 해야하기에. 다섯 시간 작업. 연필로 원본 본을 떠고 색을 입혀서 드디어 102페이지 중 한 페이지를 완성했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제법 알록달록 예뻤다. 그렇지만 아들이 잘 한다고 해주어야 작업에 탄력을 받을 것이었다. 다음 날, 아들이 좋아하는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아침으로 먹이고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결과물을 보여 주었다. “어? 괜찮네, 좋아요. 특히 이 백두산 천지, 색감 좋네! 풍경 색감이 탁월하네” 나는 아들이 칭찬해주었다고 외치며 마침 단비가 촉촉히 오고 있는 동네 골목을 막 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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