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대통령 후보 김준연의 항일투쟁
진주성-대통령 후보 김준연의 항일투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22 15:4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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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대통령 후보 김준연의 항일투쟁

김준연(金俊淵)선생의 모친은 청주 한씨.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제국대학 재학 중 조선기독교청년회 부회장이 되어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분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김준연(1895~1971년)선생은 1922~1924년 사이에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학, 법학을 전공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근무 중 1927년 전국적인 단체인 新幹會(신간회)에 가입했다.

1928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중 제 3차 공산당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함으로서 동아일보 주필을 사직하고 말았다.

광복 후 1950년 법무부 장관이 되고 1954년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전남 영암군에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 4대 5대 국회의원에 통일당 소속으로 영암군에서 연속적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최고위원과 유엔한국대표 등으로 활약했다. 1960년 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7년에는 민중당 총재가 되어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됐다.

정부는 항일투쟁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전진환(錢鎭漢)선생은 상주의 전경준과 박성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향리에서 보통학교 재학중 뜻을 정하고 1920년 5월 동경유학생이 되어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1928년)했다.

전진한(1901~1972년)선생은 1926년 한빛의 동지 이선근. 권오익 등과 협동조합 운동사를 만들어 항일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신간회 동경지회에도 동참했다.

1928년 협동조합 운동을 서울에서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2년간 고생했다. 강원도에 은둔하다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유진산. 김산 등과 신민당을 결성하고 협동조합 재건위원장이 되었다. 대일굴욕회담을 반대했다.

대한독립총연맹 소속으로 경북 상주에서 당선되었고 초대 사회부 장관이 되었고 제 2대 3대 국회의원은 부산에서도 당선됐다.

1955년 노동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1967년에는 민중당 지도위원이 되었다. 1967년 한독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저서로 ‘건국이념’ ‘자유협동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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