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항일공적
진주성-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항일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29 15:0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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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항일공적

조봉암(1899~1957년)선생의 호는 竹山(죽산) 본관은 昌寧(창녕)이다.

경기도 강화군 신원면 지산리에서 부친 조창규의 4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YMCA중학부 재학 중 3·1운동에 동참하여 퇴학당하고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일본 중앙대학 재학중 김약수 등과 흑도회에 가입.활동하였다. 귀국해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모스코바에 가서 수업을 받고 북풍회와 화요계의 주역이었고 1925년 조선공산당을 지도했다. 1932년 상해에서 첫 사랑을 만났고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김조이와 혼인했다.

1932년 일경에 피체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헌법기초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인천지역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했으나 7개월 만에 사퇴했다. 1950년 제 2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장택상과 함께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1952년 제 3대 정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제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단일 후보를 추진하다 신익희 후보가 전주에서 급서하자 야당 단독 후보가 되었고 야당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한강 모래사장에 35만명 군중이 모였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의 자서전에서 특정지역의 경우 이승만 득표의 90%가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투표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부정 선거가 판치는 형국에서 216만 표가 나왔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했으나 1958년 1월 당원 16명과 함께 피체되어 양명산의 거짓 증언에 의해 여러 가지 죄명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어 수일 만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부정 선거로 7개월 만에 종식되고 말았다.

각 정권 때 마다 죽산의 복권을 추진하고 2011년 1월 20일 수차례 재심 끝에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어 항일투사 훈장 추서가 추진되었으나 기부금 문제로 지금까지 성사되지 않았다.

무죄 판결이후 비로소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비가 건립되었고 금년에 서거 60주년을 맞아 39억을 모아 각종 사업을 추진 중이다.

죽산 선생의 아들 조규호와 큰 딸 조호정 조수정 등이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소식이다.

금번 5월~6월 대통령·부통령 시리즈는 추경화의 <항일투사열전 1권 2권>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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