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방문교수
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방문교수-함께(12)
베이징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보니 광고판에서 ‘一起聚’(이치쥐)라는 게 자주 눈에 띈다. 특별한 준비 없이 무작정 온 터라 아직 중국어에 익숙하지 않아 이런 낯선 말들이 눈길을 끄는 편이다. 현대 중국어도 엄청나게 많은 단어들을 우리와 공유하지만, 그렇지 않은 중국만의 표현들이 더 많다. (일본의 경우보다 더 많다.) ‘국가’ ‘철학’ ‘대학’ ‘공원’ ‘완성’ ‘희망’… 등등이 전자의 경우고, ‘拥挤용제’[혼잡] ‘付款부관’(결제) ‘订购정구’(주문) ‘公交车공교차’(버스) ‘结账결장’(계산) ‘毕业필업’(졸업) 등등이 후자의 경우다. ‘一起이치’(함께, 같이)라는 것도 후자에 해당한다.
‘이치쥐’라는 이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함께 모인다’는 이 표현 자체가 왠지 내 가슴에 와 닿았다. 평범한 이 말에 뭔가 중국적인 특징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중국인들이 이걸 상대적으로 좀 잘하는 편이다. 중국에서 오랜 기간 사업을 해온 BKBN의 회원들도 이 점을 확인해줬다.
이런 “이치”(함께)의 철학은 전 세계 화교들의 사업동력이라고도 했다. 서로 뭉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의 경우도 생각났다. 그들도 어떤 곳에 새로운 유대인이 들어오면 그곳 유대인 커뮤니티(공동체)의 원로들이 사업계획 등을 들어보고 가장 적절한 원로 밑에서 도제수업을 시킨 후 그 능력대로 사업을 시켜 자리 잡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두가 출자해 자금도 지원하고 나중에 성공한 후 회수한다는 것이다. 그게 타국에서 살아남는 그들의 성공비결이라고도 했다. 하버드에 있을 때 유대인 철학자인 힐러리 퍼트남의 강연회에서 그걸 실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응집력은 대단했다. 그 강연 회장이었던 ‘하버드 힐렐’이라는 장소 자체가 그렇게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마련된 공간이라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인들도 자주 화제가 되고는 한다. 그들도 응집력은 알아주어야 한다. 여러 단계의 구심점들이 있고 (예전엔 ‘한슈藩主’, ‘쇼군将軍’) 결국은 ‘텐노天皇’가 상징적인 ‘일본’ 전체의 구심점이 된다고 했다. 그것을 중심으로 저들은 함께 잘 뭉친다. ‘텐노’를 건드리면 그들이 펄펄 뛰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 응집의 핵을 건드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일본의 국가(國歌)가 이미 그런 뭉치기 기질을 보여준다고도 해석한다. ‘키미가요와 치요니 야치요니 사자레이시노 이와오도 나리테 코케노 무스마데”[君が代は千代に八千代にさざれ石の巖となりて苔のむすまで님의 세상은 천년토록 팔천년토록(천년 팔천년 영원토록)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끼도록’ 원래는 작자미상의 ‘와카’(和歌: 5-7-5-7-7인 한줄짜리 정형시)인 이 국가에서 저들은 조약돌이 바위가 된다고 노래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는 이게 가능해서 힘을 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콘크리트가 바로 그런 것이다. 조약돌이 뭉쳐 바위가 된 그 단단한 콘크리트가 바로 일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이랄까 가치관은 사실 전매특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불변한 것도 아니다. ‘지재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것들을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건 ‘베끼기’라도 좋고 ‘짝퉁’이라도 좋다. 좋게 말하면 ‘벤치마킹’을 해야 한다. 다 알다시피 중국도 그런 베끼기로 국력을 키워왔다. ‘함께 모이기’, 특히 ‘힘을 모으기’, 그게 중요한 과제의 하나임을 새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그게 ‘우리 편’ ‘우리 패거리’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우리가 결국 ‘한국’ 전체로까지 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온갖 분열, 동서남북 상하 좌우 전후 원근 노사 남녀 그 모든 가슴 아픈 분열을 넘어서 하나의 ‘한국’으로. ‘품격 있는 선진국가’는 아마 그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분열은 그 길을 가로막는 가시덤불 혹은 바리케이드, 철조망, 장벽 그런 것임을 깊이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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