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수중왕릉 문무왕의 묘
진주성-수중왕릉 문무왕의 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8.29 16:42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수중왕릉 문무왕의 묘

세계 최초로 수장한 문무왕릉은 죽어서 용신(龍神)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문무왕의 뜻에 따라 바닷속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 릉은 경북 월성군 앞바다에 자리잡고 있는데 관개석으로 되어있어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찬란한 신라문화의 꽃을 피운 경주는 그 어디를 가도 신비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신라 20대 문무왕의 릉은 더욱 신비하기만 하다.

경주에서 동쪽으로 산협을 끼고 가다보면 끝없는 산고개가 20여리나 계속된다. 이 고갯길을 넘어 가다보면 동해바다 물결이 안개속에 아른거리고 감포의 조그마한 항구가 시야에 들어온다.

감포를 뒤로하고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노송들이 있는 곳을 지나 감은사가 용당산 아래에 있는데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뼈를 동해안에 묻고 난 후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춘추왕의 아들로 태어난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한 후에 원병으로 왔던 당나라군도 물리쳐 위업을 달성, 문제는 바다건너 왜구의 잦은 노략질이었다. 경주의 관문인 용당포 언덕에 임종을 맞게 되었는데“내 뼈를 앞바다에 장사지내라 그러면 용이되어 동해를 지키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에 따라 세계에서 유례없는 수중왕릉을 만들게 된 것이다. 31대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물속에 장사지낸 뒤 부덕을 추모하여 대를 쌓고 바라보았더니 과연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나 보였다. 이로 인하여 이견대(利見臺)라고 명명했으며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문무왕이 기초했던 감은사를 완성하였다.

동해의 호국사찰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에 의해 완성되었고 증손인 경덕왕은 바다를 따라 올라 토함산 꼭대기에 석굴암을 세워 역시 호국사찰로 삼았다. 김유신이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은 슬퍼했다. 비단천필 벼2천섬 악사백명을 보내어 진혼곡을 연주하게 하였다. 문무왕을 생각하며 나룻배를 타고 대왕암을 한 바퀴 돌아보면 마치 문무왕이 연꽃 모양과도 같다.

이 동해 바다속에 있는 수중왕릉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보면 관개석이 자좌 오향(午向)으로 놓여있다. 왕룡자도선과 현모경에 이르기를 직십자 힁십자수나 봉은 명일태극성이니 그 안에는 선천운화지리가 있다고 했다.

옛 고서 <수장경> 에 해중에도 명당이 있어 수장할 경우 영원히 그 자리에 있도록 해야 한다고 쓰여있다. 문무왕릉은 독특한 방법으로 수장을 지낸 것이 아닌가 여겨져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유신장군은 용왕님의 신하가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