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제왕무치
아침을열며-제왕무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02 15: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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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
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제왕무치

‘제왕무치(帝旺無恥)’란 말이 있다. 왕은 무슨 일을 하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배경은 불투명하다. ‘장자’의 ‘응제왕’편에 중앙의 황제인 ‘혼돈(混沌)’ 이 죽는 이야기가 있다. 남해의 제왕인 ‘숙’과 북해의 제왕인 ‘홀’이 대접을 잘 받은 대가로 사람처럼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루에 한 개씩 구멍을 뚫어나가다가 마지막 날 구멍을 다 뚫어주자 중앙의 제왕인 ‘혼돈’이 죽어버렸다는 내용이다.

중앙은 모든 방향의 중심이고, 황제의 장소이며, 다스림의 핵심을 상징한다. 모든 방향을 다스리고, 모든 성장의 중심세력이다. 보아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들어도 휘둘리지 말아야 하며, 느껴도 욕심내거나 분개하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가 자극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폄훼하더라도 무심하게 잘 중심을 잡아 나가야 한다. 이른바 제왕무치의 경지에서 흔들리지 말고 존재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또 주역 제49괘 택화혁 구오에‘대인호변(大人虎變)’과 상육에 ‘군자표변(君子豹變)’이 있다. 이는 혁명과 같은 다급한 시운에서는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천하의 시운과 천하 민심에 따라 행동하여야 함을 말한다. 즉 세상 사람들의 이러쿵저러쿵 잡다한 소리에 초연하여 모든 이들의 마음과 일치하여야 한다는 의미다. 황제가 하는 모든 일에는 거침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의 좁은 단견(短見)에 얽매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왕무치’는 당나라 현종이 22살의 며느리를 뺏어서 양귀비로 삼을 때 핑계로 악용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왕은 신체조건과 마음이 낱낱이 까발리고 노출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왕의 심리적 수치심을 어루만지기 위한 자기최면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 말은 보통 사람들의 지위를 초월한 절대적 ‘강자’ 내지 ‘선민’들이 안하무인격으로 제멋대로 갑질하는 것을 비꼬는 말로서도 이용되기도 한다.

어떻든 ‘제왕무치’란 무제한적 자기애 내지 무한정한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무릇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존중하여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이런 ‘자기애(自己愛)’야 말로 자기 삶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애기애타(愛己愛他)’라는 휘호(揮毫)를 즐겨 썼다. 자기를 사랑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 생활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자기비하와 열등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까닭 없는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다. 대개 예측할 수 없는 ‘묻지마 폭력, 살상’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자기비하와 열등의식은 ‘왜곡된 자기애’의 다른 모습이라 한다.

자기비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부정적 변명에 악용되는 ‘제왕무치’와 같은 ‘절대적 자기애’ 내지 ‘무제한 나르시시즘’이다. 자기 스스로는 절대적 존재며, 무한히 선한 자이고, 사악한 다른 이, 엉터리 제도, 우연히 재수 없이 걸려들어 선량한 자아가 손상되었다는 피해의식과 정의로운 심판자 인식이다. 이런 인식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도 당당하며, 끔찍하게 시신을 훼손하고도 정의로운 행동을 하였다고 스스로 뿌듯해 한다.

이처럼 다른 이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애(自己愛)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생활을 위태롭게 만들 우려도 있다. 오로지 자기만의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 고위공직자가 될 경우 그것은 자기만의 불행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끔찍한 후과(後果)를 안겨주는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집안이 좋고 머리가 좋아 좋은 정보에 좋은 학벌에 좋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또 다른 현대판 신분세습제의 사다리에 올라앉아 고통받는 민중(民衆)들의 서러움과 애닮은 슬픔과 고통을 다만 글자로만 받아들이는 상념(想念)이나 그저 그르려니 하는 인식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높은 자리에 앉은 공직자이든, 어려운 공무원 시험을 통과한 공무원이든, 정무직으로 임명받은 공직자이든, 어쩌다 고위직에 앉은 공직자이든, 자가만의 자기애에 빠져들어 있으면 이는 심각한 재앙인 것이다.

‘비록 나는 아무 법적 도덕적 잘못이 없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고 고통을 받는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남이 옳다’는 율곡 선생의 충고가 귀에 맴돈다. 작금 매우 어지러운 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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