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건망증
도민칼럼-건망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16 16:1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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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시조 시인·작가
강병선/시조 시인·작가-건망증

엘리베이터도 없는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의 재산세를 7월 말까지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 이삼일 전, 은행에 재산세를 미리납부 하러 갔다가 고지서를 챙기지 않았다가 헛걸음을 하고는 폭염이 겁이 나, 차일 필하고 있었다. 이제는 말일이 코앞이라 불볕더위를 무릅쓰고 부랴부랴 달려가다 보니 통장을 챙기지 않았다. 통장이 있어야 돈을 인출해 재산세를 낼 것이 아닌가. 정말 맥이 풀렸다. 되돌아 왔다가 다시 은행창구에 찾아가 세금을 낼 때는 온몸은 땀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머리를 잘 굴리지 못하면 팔다리가 고생한다더니 이놈의 건망증이 삼복더위에 온 몸을 힘들게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머리에서 얼굴을 타고 내린 굵은 땀방울이 가슴을 흠뻑 적셨고 목덜미를 타고 내린 땀방울들은 등허리를 타고 있다. 치솟고 있는 불쾌지수를 끌어내리고 땀을 식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인 에어컨은 거실과 안방에 전시품이 되어 마냥 기다리게 했다. 쌍둥이 손자손녀 들이 집에 오는 주말이나 되면 이들이 움직이게 해야 할 것 같다.

젊었을 때는 한여름에도 찬물로 사워를 곧잘 했었지만 환갑이 넘고부터는 찬물사워를 못한다. 더운물로 사워를 하고 나왔더니 땀방울인지 물방울인지 거실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온수보일러를 끄는 것은 깜박한 채다. 거실에 에어컨은 30년이 다된 구형이라 전기세 폭탄이 우려 되고 안방에 벽걸이 에어컨도 땡볕에 나가 일하는 아내가 미안해서 켜지를 못하고 삼복중에 제일 덥다는 중복 날을 선풍기로 버텨야 했다.

두메산골에 나이가 많으신 부모님슬하에서 근면정신을 교육받고 자랐다. 물 한 방울 전기 한토막이라도 아껴 써야 한다는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 가족들에게도 잔소리를 입에 담고 살았었지 않은가.

이놈의 건망증은 바깥에 외출할일이 있으면 거실 벽에 선풍기를 끄고 나가야 하는데 몇 시간씩 볼일을 보고 들어오면 현관에 불이 켜져 있고 벽걸이 선풍기가 왜 이제야 오십니까. 하며 지친 듯 돌아가고 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세면대 물을 쓰고 잠그지 않고 전등을 끄는 것을 깜박하고 나오니 헛물, 헛불을 켜면서 평소에 구두쇠 노릇이 무슨 효과가 있냐고, 아내에게 지탄을 듣는다.

이보다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가끔 중요한 문학모임이나 점잖은 분을 만나러 갈 때다.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요즘 아내에게 치매 전조현상이라며 병원에 가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곤 한다.

내 친구가 건망증을 겪었던 얘기다. 수십 년 단골로 이용한 목욕탕에 일주일에 하루 쉬는 휴일을 깜박해 허탕을 치고 집에 돌아오니 부엌에서 하얀 연기가 나고 있더라고 했다. 보리차주전자를 올려놓고 끄지 않고 나갔던 것을 깨닫고 고심 끝에 ‘확인’ 이란 단어 외치기를 개발했다고 했다. 가스불끄기를 했는지, 집을 나갈 때는 현관문 잠그기를 했는지, 확인, 확인, 확인을 외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했다. 한번은 볼일을 보기 위해 집을 나왔다가 현관문 앞에서 확인소리를 외치고 나왔는지 헷갈렸다고 했다. 확인소리를 외고 있었지만 정작 집 나올 때 현관문 앞에서 확인 주문을 외웠는가, 현관문을 잠갔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나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헐레벌떡 집에 뛰어 와 보니 현관문이 열려 있더라고 했다. 이처럼 건망증은 나이가 들면 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구나, 친구의 얘기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곤 한다.

아내가 요양보호사 일을 나가면서 주전자에 보리차가 끓으면 잊지 말고 불을 끄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나간다. 그렇지만 컴퓨터 앞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으면 야속한 시간은 어찌 그리 빨리 가버리는지, 7. 8월에 번개 같다. 한두 시간은 눈 깜짝 새다.

내 나름대로 시간을 재다가 그만 깜박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물이 수증기로 날아가 버리고 스텐 주전자를 태우기 일보직전에 아차하고 부엌으로 달려간 적이 몇 번 있고부터는 친구가 하는 것처럼 ‘확인’ 작전을 사용했다.

물이 끓을 때까지는 아예 컴퓨터 앞에 앉지 않기로 했다. TV를 켜놓고 화면아래 분마다 바뀌는 시간표시를 본다. 주전자물 확인, 주전자물 확인, 이라고 주문을 외며 부엌을 몇 분차 사이를 두고 들랑날랑 하다가 물이 끓는 것을 확인 하고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나서 컴퓨터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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